노회찬의 꿈이 연주되는 시간
-전 국민 악기 지원 사업을 상상하며
문정은 노회찬재단 이사

노회찬 8주기 추모 심포지움에서 플룻과 첼로를 연주한 이주민연대 샬롬의집 '레인보우앙상블'.
'노회찬 희망악기 지원사업'으로 아이들이 마음껏 플룻을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 노회찬재단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라며 군사력이나 경제력이 아닌 문화가 융성한 나라를 꿈꿨던 김구의 백범일지로부터 한 세기 가까운 시간이 흐른 뒤, 故 노회찬 의원은 "누구나 악기 하나쯤은 다룰 수 있는 나라"라는 소박하지만 묵직한 화두를 우리 사회에 던졌습니다. 정치가 시민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넘어, 삶의 존엄과 내면의 여유까지 보장해야 한다는 선언이었습니다.
2026년 재단의 희망악기 지원 사업 심사위원으로 이번 공모를 살펴본 시간은, 그 두 거인이 꿈꾸었던 진정한 '문화 강국'의 의미를 현장의 목소리로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K-Pop과 K-Culture의 세계적인 유행으로 명실상부한 문화 강국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그 화려한 비상의 이면에는 상업화되고 엘리트화된 문화의 짙은 그늘이 존재합니다. 문화는 소수 아이돌과 거대 자본이 주도하는 화려한 산업이 되었고, 정작 대다수 평범한 시민은 무한 경쟁과 장시간 노동, 고립과 단절 속에서 악기 하나 손에 쥘 시간적, 경제적, 정신적 여유를 박탈당했습니다.
특히 우리 사회의 토대를 묵묵히 지탱하고 있지만 철저히 소외된 보이지 않는 노동자들과 약자들에게 문화 예술은 여전히 닿기 힘든 사치로 느껴집니다. 새벽 6411번 버스에 몸을 싣는 투명인간들의 고단한 삶 속에 문화를 향유할 권리가 들어설 자리는 턱없이 부족한 것이 우리의 뼈아픈 현실입니다.
연대와 환대의 선율: 2026 심사의 방향과 변
올해 심사에 참여하며 다양성과 연대라는 가치에 비중을 두었습니다. 단순히 악기를 지원하고 음악적 재능을 키우는 것을 넘어, 음악과 악기가 어떻게 공동체를 치유하고 서로를 잇는 매개체가 될 수 있는지를 살피려 노력했습니다.
이번에 선정된 10개 단체는 우리 사회의 축소판과도 같습니다. 연제구의 대리기사 노동공제회(카부기공제회)가 늦은 밤 운전대를 놓은 손으로 기타 줄을 튕기며 생계의 시름을 달래고, 영등포(아시아미디어컬쳐팩토리)와 남양주(샬롬의 집)의 이주민들이 카혼과 첼로를 통해 언어의 장벽을 넘어 화합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 거대한 교향곡이 되지 않을까요.
광주의 학교 밖 청소년(Y해밀학교), 부산의 발달장애인(한울장애인자활센타), 그리고 전국 각지의 지역아동센터와 청소년들에게 쥐어질 전자드럼과 바이올린은 단순한 물품 지원을 넘어 각자의 환경과 장애, 경제적 여건이라는 장벽을 허물고, 당당한 사회의 주체이자 예술적 주체로서 자신만의 비전을 연주하게 하려는 재단의 굳건한 의지입니다.
가난과 범죄에 노출된 빈민가 아이들에게 총 대신 악기를 쥐여주어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킨 베네수엘라의 '엘 시스테마(El Sistema)', 저소득층 아이들에게 무상으로 오케스트라 교육과 악기를 지원하는 프랑스의 '데모스(Démos)' 프로젝트는 국가 단위의 문화 복지가 어떻게 사회를 근본적으로 개혁하는지 보여주는 귀감입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핵심은, 이 프로젝트들이 단순한 취약계층 복지에 머물지 않고 청년 음악가들과 예술 교육자들에게 안정적인 일자리를 제공하는 '문화-경제의 선순환 생태계'를 구축했다는 사실입니다. 시민에게는 문화 향유권을, 늘 생계의 위협에 시달리는 예술인에게는 정당한 노동의 기회를 보장하는 훌륭한 국가적 인프라 사업인 셈입니다.
노회찬 재단의 이번 사업 규모는 시설당 100만 원 남짓이지만, 이 씨앗을 키워 '전 국민 악기 지원 사업'이라는 국가적 의제로 확장해 볼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모든 시민이 생애주기 중 한 번, 자신만의 첫 악기를 가질 수 있도록 30만 원 상당의 '문화 평등 바우처'를 지급한다고 가정하면. 매년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약 35만 명의 아동에게 전면 실시할 경우 연간 약 1,000억 원이 소요되며, 사회적 취약계층 300만 명을 대상으로 일괄 실시하더라도 약 9,000억 원 수준입니다.
이 상상력을 실현할 재원 마련의 방식 또한 진일보해야 합니다. 매년 경제성 없이 지역구 선심성으로 편성되어 콘크리트에 쏟아붓는 수조 원 규모의 불요불급한 토건 예산, 명확한 증빙 없이 소진되는 관공서 특수활동비의 전환은 당연한 과제입니다. 이에 더해 우리는 최근 화두로 떠오른 'AI 기금' 등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환원 모델을 적극적으로 고민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거대 기술 기업과 자본이 우리 사회가 오랫동안 축적해 온 공공의 데이터와 문화적 자산을 학습하여 막대한 부를 창출하는 인공지능 시대입니다. 이 첨단 산업의 이윤 일부를 사회적 기금으로 환원하여, 기계가 결코 대체할 수 없는 인간 고유의 예술적 감수성과 창조성을 보호하고 육성하는 데 투자하는 것은 지극히 정당한 분배 정의의 실현입니다.
시민의 손에 쥐어진 악기 하나가 소외된 예술인의 일자리로 이어지고, 첨단 기술이 창출한 거대한 부가 가장 낮은 곳의 문화적 온기로 환원되는 사회. 쓸모없이 파헤쳐지는 도로 대신 시민의 마음에 6411번의 선율이 흐르는 길을 내는 것, 이것이 노회찬이 꿈꾸었던 진정한 '문화 강국'의 미래일 것입니다.
오랜 시간 압력솥에서 뭉근하게 끓여내야 깊은 맛이 우러나는 진한 차처럼, 문화의 힘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지만 한 번 스며들면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다고 믿습니다. 이번 지원 사업을 통해 전국 각지로 퍼져나갈 10개의 작은 오케스트라가 각자의 삶터에서 아름다운 공명을 일으키기를 바랍니다.
선정된 단체에 축하의 인사를, 아쉽게 선정되지 못한 단체에는 깊은 위로와 연대의 마음을 전합니다. 노회찬재단이 앞으로도 투명인간들의 곁에서, 누구나 악기 하나쯤 다루며 웃을 수 있는 평등하고 공정한 나라를 향해 멈추지 않고 나아가도록 함께하겠습니다.
노회찬의 꿈이 연주되는 시간
-전 국민 악기 지원 사업을 상상하며
문정은 노회찬재단 이사
노회찬 8주기 추모 심포지움에서 플룻과 첼로를 연주한 이주민연대 샬롬의집 '레인보우앙상블'.
'노회찬 희망악기 지원사업'으로 아이들이 마음껏 플룻을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 노회찬재단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라며 군사력이나 경제력이 아닌 문화가 융성한 나라를 꿈꿨던 김구의 백범일지로부터 한 세기 가까운 시간이 흐른 뒤, 故 노회찬 의원은 "누구나 악기 하나쯤은 다룰 수 있는 나라"라는 소박하지만 묵직한 화두를 우리 사회에 던졌습니다. 정치가 시민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넘어, 삶의 존엄과 내면의 여유까지 보장해야 한다는 선언이었습니다.
2026년 재단의 희망악기 지원 사업 심사위원으로 이번 공모를 살펴본 시간은, 그 두 거인이 꿈꾸었던 진정한 '문화 강국'의 의미를 현장의 목소리로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K-Pop과 K-Culture의 세계적인 유행으로 명실상부한 문화 강국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그 화려한 비상의 이면에는 상업화되고 엘리트화된 문화의 짙은 그늘이 존재합니다. 문화는 소수 아이돌과 거대 자본이 주도하는 화려한 산업이 되었고, 정작 대다수 평범한 시민은 무한 경쟁과 장시간 노동, 고립과 단절 속에서 악기 하나 손에 쥘 시간적, 경제적, 정신적 여유를 박탈당했습니다.
특히 우리 사회의 토대를 묵묵히 지탱하고 있지만 철저히 소외된 보이지 않는 노동자들과 약자들에게 문화 예술은 여전히 닿기 힘든 사치로 느껴집니다. 새벽 6411번 버스에 몸을 싣는 투명인간들의 고단한 삶 속에 문화를 향유할 권리가 들어설 자리는 턱없이 부족한 것이 우리의 뼈아픈 현실입니다.
연대와 환대의 선율: 2026 심사의 방향과 변
올해 심사에 참여하며 다양성과 연대라는 가치에 비중을 두었습니다. 단순히 악기를 지원하고 음악적 재능을 키우는 것을 넘어, 음악과 악기가 어떻게 공동체를 치유하고 서로를 잇는 매개체가 될 수 있는지를 살피려 노력했습니다.
이번에 선정된 10개 단체는 우리 사회의 축소판과도 같습니다. 연제구의 대리기사 노동공제회(카부기공제회)가 늦은 밤 운전대를 놓은 손으로 기타 줄을 튕기며 생계의 시름을 달래고, 영등포(아시아미디어컬쳐팩토리)와 남양주(샬롬의 집)의 이주민들이 카혼과 첼로를 통해 언어의 장벽을 넘어 화합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 거대한 교향곡이 되지 않을까요.
광주의 학교 밖 청소년(Y해밀학교), 부산의 발달장애인(한울장애인자활센타), 그리고 전국 각지의 지역아동센터와 청소년들에게 쥐어질 전자드럼과 바이올린은 단순한 물품 지원을 넘어 각자의 환경과 장애, 경제적 여건이라는 장벽을 허물고, 당당한 사회의 주체이자 예술적 주체로서 자신만의 비전을 연주하게 하려는 재단의 굳건한 의지입니다.
가난과 범죄에 노출된 빈민가 아이들에게 총 대신 악기를 쥐여주어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킨 베네수엘라의 '엘 시스테마(El Sistema)', 저소득층 아이들에게 무상으로 오케스트라 교육과 악기를 지원하는 프랑스의 '데모스(Démos)' 프로젝트는 국가 단위의 문화 복지가 어떻게 사회를 근본적으로 개혁하는지 보여주는 귀감입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핵심은, 이 프로젝트들이 단순한 취약계층 복지에 머물지 않고 청년 음악가들과 예술 교육자들에게 안정적인 일자리를 제공하는 '문화-경제의 선순환 생태계'를 구축했다는 사실입니다. 시민에게는 문화 향유권을, 늘 생계의 위협에 시달리는 예술인에게는 정당한 노동의 기회를 보장하는 훌륭한 국가적 인프라 사업인 셈입니다.
노회찬 재단의 이번 사업 규모는 시설당 100만 원 남짓이지만, 이 씨앗을 키워 '전 국민 악기 지원 사업'이라는 국가적 의제로 확장해 볼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모든 시민이 생애주기 중 한 번, 자신만의 첫 악기를 가질 수 있도록 30만 원 상당의 '문화 평등 바우처'를 지급한다고 가정하면. 매년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약 35만 명의 아동에게 전면 실시할 경우 연간 약 1,000억 원이 소요되며, 사회적 취약계층 300만 명을 대상으로 일괄 실시하더라도 약 9,000억 원 수준입니다.
이 상상력을 실현할 재원 마련의 방식 또한 진일보해야 합니다. 매년 경제성 없이 지역구 선심성으로 편성되어 콘크리트에 쏟아붓는 수조 원 규모의 불요불급한 토건 예산, 명확한 증빙 없이 소진되는 관공서 특수활동비의 전환은 당연한 과제입니다. 이에 더해 우리는 최근 화두로 떠오른 'AI 기금' 등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환원 모델을 적극적으로 고민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거대 기술 기업과 자본이 우리 사회가 오랫동안 축적해 온 공공의 데이터와 문화적 자산을 학습하여 막대한 부를 창출하는 인공지능 시대입니다. 이 첨단 산업의 이윤 일부를 사회적 기금으로 환원하여, 기계가 결코 대체할 수 없는 인간 고유의 예술적 감수성과 창조성을 보호하고 육성하는 데 투자하는 것은 지극히 정당한 분배 정의의 실현입니다.
시민의 손에 쥐어진 악기 하나가 소외된 예술인의 일자리로 이어지고, 첨단 기술이 창출한 거대한 부가 가장 낮은 곳의 문화적 온기로 환원되는 사회. 쓸모없이 파헤쳐지는 도로 대신 시민의 마음에 6411번의 선율이 흐르는 길을 내는 것, 이것이 노회찬이 꿈꾸었던 진정한 '문화 강국'의 미래일 것입니다.
오랜 시간 압력솥에서 뭉근하게 끓여내야 깊은 맛이 우러나는 진한 차처럼, 문화의 힘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지만 한 번 스며들면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다고 믿습니다. 이번 지원 사업을 통해 전국 각지로 퍼져나갈 10개의 작은 오케스트라가 각자의 삶터에서 아름다운 공명을 일으키기를 바랍니다.
선정된 단체에 축하의 인사를, 아쉽게 선정되지 못한 단체에는 깊은 위로와 연대의 마음을 전합니다. 노회찬재단이 앞으로도 투명인간들의 곁에서, 누구나 악기 하나쯤 다루며 웃을 수 있는 평등하고 공정한 나라를 향해 멈추지 않고 나아가도록 함께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