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6~1975)
1956 (1세)
출생
노회찬은 1956년 8월 31일 부산역이 내려다보이는 부산시 초량동에서 태어났다. (이후 초량초등학교와 부산중학교, 경기고등학교를 거쳐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우리 집이 산비탈에 있는 마지막 산동네였기 때문에 놀 수 있는 데가 산밖에 없었어요. 늘 산에서 뛰어다녔습니다. … 동물과 식물에 애착이 갔어요. 웬만한 것은 거의 다 집으로 가져와 계속 키웠죠. 그런 것들을 굉장히 좋아해서 중학교에 와서도 생물반에서 활동했습니다.”
<노회찬 평전> 38쪽
1967 (11세)
학교와 교과서
노회찬은 부산 시절 자기를 키운 8할은 학교라고 말했다. 선생님, 친구, 교과서가 있는 학교생활에 대한 만족도가 높았다.
“어느 설문조사에서 살아오면서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이 뭐냐고 해서 ‘교과서’라고 쓴 적이 있어요. 실제로 저는 교과서를 굉장히 좋아했어요. …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것이 제 상상력, 감수성 등을 많이 일깨워줬던 것 같습니다.”
<노회찬 평전> 42-43쪽
1970 (14세)
첼로
노회찬은 1970년 넉넉지 않은 형편에도 “악기 한 가지는 다룰 수 있어야 한다”는 부모님의 소신 덕분에 첼로를 배웠고, 고교시절 이화여고 축제에 초대받아 연주회를 열 정도로 예술적 재능을 발휘하였다.
“오늘 특별활동 시간에 내가 첼로를 켰다. 그런데, 학교에 있는 첼로는 보기 위해서 있는 것이므로 소리가 잘 나지 않았다. 선생님께서 아무 곡이나 하라고 하셔서 베토벤 미뉴에트를 켰다. 다음부터는 악보를 가지고 가야겠다.”
1970년 5월 8일 일기장 (부산중학교 2학년)
1972 (16세)
유신과 헌법
노회찬은 1972년 10월 국회 해산과 유신 선포 소식을 듣고 직접 광화문에 나가 그 현장을 확인했고, 이후 고교 재학 시절인 1973년 유신독재반대 유인물을 제작해 배포했다.
“시청 건너편의 당시 국회의사당 앞에는 탱크가 버티고 서 있었으며 중앙청 앞에는 장갑차 두 대와 무장군인들이 지키고 있었다. 전쟁을 겪은 소년은 이미 소년이 아니라던가?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올 때 나는 이미 교과서를 믿고 어른 말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소년이 아니었다.”
<P&P 정치뉴스>와의 인터뷰, 1995.11.3.
(1976~1992)
1981 (25세)
참당암의 결의
1981년 8월, 노회찬은 고창 선운사 참당암에서 한 달 동안 은거하며 마음을 어지럽히는 생각을 정리하고 노동현장으로 투신할 결의를 다졌다.
“‘물의 흐름’처럼 역사에 나를 맡겨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명예나 이익을 탐하기보다 시대가 요구하는 일을 하는 것이 도리라고 판단했다. 어릴 때부터 배운 ‘대의(大義)에 서라’를 떠올렸다. 상식이 통하고 약속이 지켜지는 ‘정의가 바로 서 있는 사회’를 만드는 데 힘을 보태기로 마음을 굳혔다.”
<월간 불광> 2010년 1월호 ‘참당암의 여름에 내린 결정’
1983 (27세)
노동운동
노회찬은 1983년 전기용접기능사 2급 자격증을 취득한 뒤 서울, 부천을 거쳐 인천에서 용접공으로 일하며 노동운동을 시작했다.
“인생에서 가장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는 시절은 용접공 시절이다. … 노동운동은 인간해방운동이다. 무슨 심오한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고 싶은 본능이자 최고의 가치를 구현하는 운동이다. 따라서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그날까지 멈출 수 없는 운동이다."
매일노동뉴스와의 인터뷰, 2012.03.27
수배
노회찬은 노동운동과 인민노련 결성 등을 이유로 7년 동안 수배생활을 했다. 노회찬은 산업재해로 쉬었던 몇 달 동안 『노동자와 노동절』(석탑)을 집필했으며, 수배생활 동안 노동자를 위한 이론 지침서를 만들어 교육과 훈련 활동을 했다.
“이제까지 노동운동은 다 잊어먹어라. 지금 한 번도 상상도 못하고 격지도 못한 새로운 상황에 이미 우린 들어와 있다. … 그리고 6월 항쟁의 성과와 한계 속에서 배제되었던 노동이 들고일어나는 상황이 왔다. 이 규모가 어떻게 될지 우리는 짐작을 못한다.”
이광일, 성공회대 구술사 ‘노회판 편’, 2006
1988 (32세)
결혼
노회찬은 인천에서 함께 노동운동을 하던 김지선과 1988년 12월 17일 결혼했다. 노회찬은 이후 “이 사람과 결혼하면 더 나은 사람이 될 것 같아 결혼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성공은 아내와의 결혼이다”고 말했다.
1989 (33세)
수감생활
노회찬은 결국 1989년 12월 23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어 25일 구속되었다. 수번 336번. 노회찬은 1992년 4월 출소하기까지 감옥생활에 대해 “노동운동과 진보정당 건설에 대한 새로운 전략과 이론을 준비하는 시간으로 활용했다”고 소회를 밝혔다.
“저는 날이 따뜻해지면 운동장 한 구석에라도 심을 요량으로 해바라기 씨앗을 몇 개 구해 놓았습니다. 내일의 희망이 있는 사람에겐 오늘의 고통이 이미 고통이 아니죠. 더욱이 용기 있는 사람에겐 모진 시련이 오히려 걸찍한 거름으로 변해버리지요.”
부모님께 보낸 옥중서신, 1991년 2월 26일
1992 (36세)
진보정당
노회찬은 1992년 12월 치러진 대통령 선거 당시 ‘민중대통령 백기완 후보 선거운동본부’ 조직위원장을 맡아 “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설파했으며, 진보정당의 암흑기였던 1992~1998년 진보정당추진위원회·진보정치연합 대표, 국민승리21 정책기획위원장을 맡아 진보정당 건설에 본격적으로 앞장섰다.
“진보정당의 꿈을 놓지 못하는 것은 현실 가능성이 크기 때문도 아니고, 그 꿈이 너무 아름다워 포기하기가 어렵기 때문도 아니다. 그 꿈 이외에는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그 꿈이 실현되지 않고서는 정치가 사람의 희망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진보의 재탄생>, 꾸리에, 2010
(1956~1975)
1993 (37세)
매일노동뉴스
노회찬은 1993년 5월 창간호부터 약 10년 동안 매일노동뉴스 발행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당시 노회찬은 “노사문제 해결의 관건은 정보를 공유하는 것이다. 기업주는 노동자를 생산의 도구로만 여길 게 아니라 동반자로서 협력을 요청해야 한다”고 말했다.
“당시 노동전문 일간지를 하겠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미쳤다고 했다. 주간으로 가야 한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았다. 결국 일간지를 냈다. 전 세계 최초였다. … 창간 초기 우격다짐으로 10년간 발행인을 맡은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다.”
매일노동뉴스, 2012.03.27
2000 (44세)
민주노동당
노회찬은 민주노총, 전빈련 등과 함께 민주노동당 창당을 주도해 마침내 2000년 1월 30일 민주노동당이 창당되었다. 노회찬은 민주노동당 부대표, 서울시당 위원장, 사무총장을 역임했다. 또한, 당시 노회찬은 <전국구 방식의 국회의원 선출제도>에 대한 위헌소송 제기해 2001년 7월 위헌 판결을 이끌어냄으로써 <1인 2표 정당명부 비례대표제> 도입을 이뤄냈다.
“고난의 세월 끝에 당은 창당됐는데, 저는 진심으로 너무 기뻤습니다. 그때 어떤 생각이었냐면, 제 인생의 목표의 반은 이루어졌다, 반이나 이루어졌다. 창당을 한 것만으로도.”
노회찬.김어준.진중권 외, <진보의 재탄생: 노회찬과의 대화>, 꾸리에, 2010, 129쪽
2004 (48세)
삼겹살 불판
노회찬은 2004년 17대 총선 당시 민주노동당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아 선거운동을 진두지휘해 진보정당 최초의 원내진출이라는 쾌거를 이뤄내는데 큰 역할을 했다. 또한, 선거운동 과정에서 TV토론 등을 통해 “50년 된 낡은 불판을 갈아야 한다”고 일갈하는 등 국민들의 마음을 울리고 정치에 대한 희망을 갖게 하는 ‘노회찬어록’을 남겼다.
"50년 동안 똑같은 불판 위에서 삼겹살을 구워 먹으면 고기가 새까맣게 탑니다. 이제는 불판을 갈아야 합니다. 50년 된 불판을 통째로 갈아야 합니다."
KBS <심야토론>, 2004년 3월 25일
2005 (49세)
삼성 X파일
노회찬은 2005년 8월 18일, 법제사법위원회에서 거대권력인 재계와 검찰, 언론 사이의 부정한 결탁을 끊고 국민의 알권리를 실현하기 위해 “안기부 불법도청 녹취록”인 소위 “삼성X파일”에 담긴 ‘떡값검사 명단’을 공개했다.
“도둑을 보고 ‘도둑이야’라고 외쳤는데 도둑은 안 잡고 소리친 사람만 소란죄로 체포되는 것과 같은 지경인 셈이다. 그러나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X파일을 공개하면서 ‘나를 기소하라’고 외쳤고, 기소된 뒤 법정에 서서 재판장에게 ‘다시 똑같은 상황이 와도 똑같이 행동할 것이다’라고 진술했다.”
<노회찬과 삼성 X파일>, 이매진(2012) 18-19쪽
돋보인 초선 국회의원
노회찬은 2004년 9월 호주제 폐지를 위한「민법 개정안」을 발의하고, 2005년 9월「장애인차별금지법 제정안」을 발의했으며 두 법안은 17대 국회에서 본회의를 통과해 여성과 장애인의 권리 확대에 큰 획을 그었다. 또한, 노회찬은 2006년 “법 앞에 만 명만 평등하다”는 명언을 남기며 ‘전관예우’, ‘유전무죄-무전유죄’로 대표되는 사법 현실에 맞섰으며, 중소자영업자들에 대한 부당한 신용카드 가맹점 수수료 제도를 개혁하는데 앞장섰다. 조선왕조실록 환수위원으로 활동해 조선왕조실록이 환수되는 데에도 기여했으며, 격무에 시달리는 소방공무원들의 노고를 기리기 위한 소방공무원 처우개선 입법에서도 성과를 이뤄냈다.
(2008~2018)
2008 (52세)
노회찬의 약속
노회찬은 2008년 총선 직후 서울시 노원구에서 <노회찬마들연구소>를 창립해 ‘명사초청 월례특강’을 41회 개최하는 등 지역 주민들과 함께 하는 정치활동의 모범을 만들어냈다. 2009년 진보신당 대표로 선출되었고, 그해 12월 삼성 X파일 사건 2심 선고공판에서 무죄판결이 나왔다. 2010년 4월 13일 6411번 버스 새벽 첫차를 탑승했고, 6월 지방선거에 ‘엄마와 아이가 행복한 서울’을 슬로건으로 서울시장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우리는 행복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미 그 꿈은 나의 곁에, 우리 모두의 곁에 와 있습니다. 그 아름다운 미래의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 모자란 것은 서로의 지혜로 채워 넣고, 힘이 부족하면 서로 어깨를 걸어야만 합니다. 그렇게 지혜와 의지를 나누어야 합니다.”
<노회찬의 약속>, 레디앙(2010), 서문
2012 (56세)
압도적 당선과 의원직 상실
노회찬은 2012년 총선에서 57.2%라는 압도적 지지로 당선되었다. 19대 국회 정무위에서 재벌대기업의 지배구조 민주화를 위한 입법 활동뿐만 아니라 대기업의 갑질횡포를 당하는 중소기업들, 금융기관들에 의해 부당한 피해를 당하고 있는 국민들의 경제적 피해를 방지함으로써 국민들이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경제민주화 입법을 추진했다. 그러나 7년간 진행된 ‘삼성X파일 떡값검사 명단 공개 사건’ 재판 결과 2013년 2월 14일, ‘보도자료를 배포한 것은 국회의원 면책특권에 해당하고 그것을 홈페이지에 게시한 것은 면책특권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취지의 시대착오적 판결로 국회의원직을 상실했다. 이후 대법원은 같은 사건의 민사소송에서 ‘떡값검사 실명공개’의 공익성을 인정하며 무죄판결을 내렸다.
“선거와 무관한 가치 추구는 운동의 영역에서 하면 된다. … 정당은 계속 국민들에게 평가받아야 한다. 좋게 평가받으면 그만큼 권력을 갖게 되고, 권력을 잘 행사하면 더 큰 것을 얻을 수 있다. 그런데 평가받기를 두려워하거나 평가하기를 거부한다. 자신의 공동체나 신념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 진보는 이런 관념을 탈피해서 좀 더 확실하게 세속화돼야 한다.”
노회찬 평전, 456~457쪽
2016 (60세)
진보정당 최초 3선 국회의원
노회찬은 2016년 4월 20대 총선에 출마하며 “노동이 존중되는 선진복지국가를 실현하는데 몸 바치겠다”고 외쳤고, 경남 창원시 성산구에서 진보정당 최초의 3선 국회의원이 되었다. 노회찬은 2016년 5월부터 2년여 동안 정의당 원내대표였으며, 2018년 4월 결성된 공동교섭단체 ‘평화와정의 의원모임’의 첫 원내대표를 맡았다. 노회찬은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산업재해보상보험법 개정안, 정리해고제한법(근로기준법 개정안) 등 노동자의 권리와 안전을 강화하는 법안과 신용카드수수료 인하법(여신금융업법 개정안), 대형복합쇼핑몰규제법(유통산업발전법 개정안) 등 중소자영업 보호 법안을 발의했으며, 장애인에 대한 관광차별 금지법(장애인차별금지법 개정안) 개정을 실현하는 등 열정과 경륜으로 사회 약자들을 대변했다. 또한, 노회찬은 20대 국회 최초로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설치법을 발의하고, 제왕적 대법원장체제 개혁방안을 제시하는 등 검찰개혁과 사법개혁에도 앞장섰으며, 국회 특수활동비 폐지를 제기해 실현시키는 등 정치개혁에서도 모범적인 의정활동을 전개했다.
“제가 있는 의원회관 5층을 청소하는 청소노동자 중 한 분에게 여쭤보니 새벽 6시부터 오후 4시까지 일하면서 약 130만원 가량의 월급을 받습니다. 주말에 특근까지 해야만 140만원이 조금 넘는 액수를 수령할 뿐입니다. 국회의원 세비를 반으로 줄이더라도 우리나라 근로자 평균 임금의 세배, 최저임금의 다섯배 가까운 액수입니다. 같이 삽시다. 그리고 같이 잘 삽시다.”
비교섭단체 대표연설, 2016년 7월
2017 (61세)
촛불혁명과 탄핵
2016~2017년 촛불혁명은 1960년 4.19혁명과 1987년 6월 시민항쟁 이후 한국현대사에서 세 번째로 기록될 시민혁명이었다. 노회찬은 앞선 두 번의 ‘혁명’이 쫒아내려 했던 정권을 온전히 극복하지 못하고 연장시킨 사실을 환기하며 촛불혁명은 그 전철을 밞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는 모두 촛불 이전 시대에 태어났습니다. 영어로는 서력기원전을 비포 크라이스트, BC라고 쓰는데, 촛불 이전 시대는 ‘비포 캔들’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 우리는 기원전에 태어났지만 기원후를 어떻게 보낼까를 고민하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촛불 이후의 시대, 앞으로 잘 가꾸어서 지속해야 할 이 시대,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시대, 우리는 모두 시대적 전환기를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꿈꾸는 나라>, 창비(2018), 20쪽
2018 (62세)
너무 짧았던 마지막 봄
“어젯밤 9시에 노회찬 의원 조문을 갔다. 줄을 선 지 1시간 만에 조문을 할 수 있었다. 재난 수준의 폭염과 열대야에도 불구하고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 입구부터 지하 2층까지 이어진 추모행렬. 거기에는 어떤 특권도 없었다. 나라의 한다 하는 고위층 인사도 추모 행렬에 서서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옮겨서야 조문을 할 수 있었다. 노회찬 의원을 추모하는 마음에서는 모두 평등했고, 어떤 새치기도 건너뛰기도 없었다. 줄에 서서 조문을 기다리는 고위층 인사들을 보면서 노회찬 의원이 만들어낸 모습이라 생각했다.” - 박래군 페이스북, 2018년 7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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