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0m, 150명의 인간 띠…책과 사람이 이어진 날 [6411의 목소리]

2026-05-17
지난 3월26일 인천 배다리 헌책방거리에서 열린 나비날다책방의 이사 프로젝트 ‘책나르샤’에 참여한 이사꾼 150여명이 한 줄로 서서 책을 손에서 손으로 나르고 있다. 나비날다책방 제공
지난 3월26일 인천 배다리 헌책방거리에서 열린 나비날다책방의 이사 프로젝트 ‘책나르샤’에 참여한 이사꾼 150여명이 한 줄로 서서 책을 손에서 손으로 나르고 있다. 나비날다책방 제공

청산별곡(가명) | 배다리 독립서점 ‘나비날다’ 책방지기

 지난 3월26일 오후 2시. 인천 배다리 헌책방거리에 280m의 인간 띠가 생겼다. 사람들은 한 줄로 서서 책을 손과 손으로 건넸으며, 책은 150명의 손길로 천천히 이동했다. ‘나비날다책방’의 이사 프로젝트 ‘책나르샤’ 풍경이었다.

배다리는 인천 원도심의 오래된 책 마을이다. 한때는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학생과 노동자, 문학청년과 예술가들이 골목을 드나들었다. 많은 것이 변했지만 여전히 오래된 책 냄새와 빛바랜 책등, 세월의 먼지가 남아 있다. 개발과 쇠퇴의 시간을 견디면서 배다리는 자기만의 속도로 살아남았다. 나비날다책방도 그 흐름 속에 있었다. 책방 문을 연 지 어느덧 17년, 세번 이사했고 이번이 네번째 자리 옮김이었다.

가까운 거리라 트럭을 불러 상자를 옮기면 그만이었지만 ‘사람들과 함께 책을 나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문득 머릿속을 스쳤다. 새 공간과의 거리는 280m 남짓. 손에서 손으로 책을 건네며 눈 맞추고, 웃고, 책 제목과 표지, 작가 이름으로 말문이 터지는 광경을 떠올렸다. 기분 좋은 상상은 의외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재미있겠다”, “같이 하자”는 말이 이어졌고 자연스럽게 기획단이 꾸려졌다. 배다리 사람들과 동네 책방들도 흔쾌히 함께 하겠다고 했다.

새삼 걱정이 밀려왔다. 평일 오후에 사람들이 올까. 낯선 이들과의 노동을 부담스러워하지는 않을까. 100명 가까운 인원이 모이면 안전은 괜찮을까. 누구도 소외되지 않고 더불어 웃을 수 있을까. 무엇보다 ‘대가 없는 노동’이 누군가에게 희생처럼 남지 않기를 바랐다. 걱정은 기우였다. 150여명이 참여 신청을 했고, ‘이사꾼’을 위한 이웃들의 간식 후원이 이어졌다. 일이 축제가 되는 순간이었다.

기획단은 자발적으로 깃발을 제작하고 안전 동선을 살폈다. 누구의 지시도 없이 스스로 마음을 냈다. 그 진심이 참 고마웠다. 배다리 골목에 하나둘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반차를 내고 온 직장인, 하루 연차를 쓰고 달려온 친구, 제주에서 비행기를 타고 온 지인도 있었다. 4개월 된 아기를 유아차에 태우고 온 가족,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소식을 보고 혼자 신청해 온 인친(인스타그램 친구)들…. 몇번이나 울컥했다. 작은 동네 책방 이사에 어쩜 이렇게 많은 이들이 시간을 내줄까. 책이 뭐라고, 책방이 뭐라고.

사람들은 책을 옮기러 온 게 아니었다. 어쩌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러 온 건지도 몰랐다. 17년 동안 책방에서 맺어온 인연들, 책방을 통해 이어진 관계들, 그 인연이 줄줄이 엮어낸 아름다운 구슬이 바로 ‘책나르샤’의 정경이었다. “이 책 읽어봤어요?” “내가 좋아하는 작가예요.” 책 한권이 지날 때마다 짧은 대화가 피어났다. “나비날다책방 책은 내 손 안 거친 게 없다.” 누군가 웃으며 내뱉은 말이 여운처럼 남아 있다.

아, 책방은 혼자 만드는 공간이 아니구나. 누군가의 걸음으로 채워지고, 누군가의 손길로 유지되고,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살아남는 공간이구나. 행사는 세시간 만에 끝났다. 1만권의 책이 150명의 손을 거쳐 새 공간으로 옮겨졌다. 마지막 책이 도착했을 때 사람들 사이에서 박수가 터졌다.

“우리가 해냈다!”

그날 밤 쉽게 잠들지 못했다. 사회관계망서비스에 올라온 사진과 댓글을 하나하나 읽었다. “감동이었다”, “따뜻한 하루였다”, “오래 기억될 것 같다”라는 글을 보며 한참 동안 먹먹했다. 책방 이사를 하며 이렇게 큰 위로를 받을 줄은 몰랐다. 동네 책방 운영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온라인 서점과 거대한 자본 사이에서 작은 책방 하나 유지하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고단하다. 임대료를 걱정하고, 그야말로 ‘계산기를 두드려가며’ 버틴다. 그럼에도 매일 책방 문을 여는 이유는 결국 사람 때문이다. 책이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기 때문이다.

‘책나르샤’는 몹시 비효율적인 이사였지만 가장 느린 방식으로 오래 남을 추억을 만들었다. 그날 배다리 골목에서 손에서 손으로 전해진 것은 책만이 아니었다. 다정함과 온기, 그리고 함께 살아간다는 감각이었다. 여전히 동네 곳곳의 작은 책방들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책과 사람을 이어주고 있다. 책을 팔기보다 삶을 나누고, 문화를 만들고, 사람을 연결하며 버텨내고 있다. ‘책나르샤’가 우리 곁의 작은 책방을 한번 더 돌아보는, 서로 돌봄의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지난 3월26일 인천 배다리 헌책방거리에서 나비날다책방의 이사 프로젝트 ‘책나르샤’를 마친 이사꾼 150여명이 드론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나비날다책방 제공
지난 3월26일 인천 배다리 헌책방거리에서 나비날다책방의 이사 프로젝트 ‘책나르샤’를 마친 이사꾼 150여명이 드론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나비날다책방 제공

※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삶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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