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회찬재단 - 평등하고 공정한 나라


노회찬의 삶

  • 1956
    출생

    노회찬은 1956년 8월 31일 부산역이 내려다보이는 부산시 초량동에서 태어나 초량초등학교, 부산중학교, 경기고등학교를 거쳐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 1970
    첼로

    노회찬은 1970년 넉넉지 않은 형편에도 “악기 한 가지는 다룰 수 있어야 한다”는 부모님의 소신 덕분에 첼로를 배웠고, 고교시절 이화여고 축제에 초대받아 연주회를 열 정도로 예술적 재능을 발휘하였다.

  • 1972
    유신

    노회찬은 1972년 10월 국회 해산과 유신 선포 소식을 듣고 직접 광화문에 나가 그 현장을 확인했고, 이후 고교 재학 시절인 1973년 유신독재반대 유인물을 제작해 배포했다.

  • 1983
    전기용접기능사 2급

    노회찬은 1983년 전기용접기능사 2급 자격증을 취득한 뒤 서울, 부천을 거쳐 인천에서 용접공으로 일하며 노동운동을 시작했다.

  • 수배

    노회찬은 노동운동과 인민노련 결성 등을 이유로 7년 동안 수배생활을 했다. 노회찬은 산업재해로 쉬었던 몇 달 동안『노동자와 노동절』(석탑)을 집필했으며, 수배생활 동안 노동자를 위한 이론 지침서를 만들어 교육과 훈련 활동을 했다.

  • 1988
    결혼

    노회찬은 인천에서 함께 노동운동을 하던 김지선과 1988년 12월 17일 결혼했다. 노회찬은 이후 “이 사람과 결혼하면 더 나은 사람이 될 것 같아 결혼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성공은 아내와의 결혼이다”고 말했다.

  • 1989
    구속과 수감생활

    노회찬은 결국 1989년 12월 23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어 25일 구속되었다. 수번 336번. 노회찬은 1992년 4월 출소하기까지 감옥생활에 대해 “노동운동과 진보정당 건설에 대한 새로운 전략과 이론을 준비하는 시간으로 활용했다”고 소회를 밝혔다.

  • 1992
    진보정당 건설

    노회찬은 1992년 12월 치러진 대통령 선거 당시 ‘민중대통령 백기완 후보 선거운동본부’ 조직위원장을 맡아 “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설파했으며, 진보정당의 암흑기였던 1992~1998년 진보정당추진위원회·진보정치연합 대표, 국민승리21 정책기획위원장을 맡아 진보정당 건설에 본격적으로 앞장섰다.

  • 1993
    매일노동뉴스 발행인

    노회찬은 1993년 5월 창간호부터 약 10년 동안 매일노동뉴스 발행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당시 노회찬은 “노사문제 해결의 관건은 정보를 공유하는 것이다. 기업주는 노동자를 생산의 도구로만 여길 게 아니라 동반자로서 협력을 요청해야 한다”고 말했다.

  • 2000
    민주노동당 창당

    노회찬은 민주노총, 전빈련 등과 함께 민주노동당 창당을 주도해 마침내 2000년 1월 30일 민주노동당이 창당되었다. 노회찬은 민주노동당 부대표, 서울시당 위원장, 사무총장을 역임했다. 또한, 당시 노회찬은 <전국구 방식의 국회의원 선출제도>에 대한 위헌소송 제기해 2001년 7월 위헌 판결을 이끌어냄으로써 <1인 2표 정당명부 비례대표제> 도입을 이뤄냈다.

  • 2004
    민주노동당 총선, 돌풍의 주역

    노회찬은 2004년 17대 총선 당시 민주노동당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아 선거운동을 진두지휘해 진보정당 최초의 원내진출이라는 쾌거를 이뤄내는데 큰 역할을 했다. 또한, 선거운동 과정에서 TV토론 등을 통해 “50년 된 낡은 불판을 갈아야 한다”고 일갈하는 등 국민들의 마음을 울리고 정치에 대한 희망을 갖게 하는 ‘노회찬어록’을 남겼다.

  • 17대 국회의 마지막 당선자

    노회찬은 17대 국회 당시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8번 후보로 출마했다. 노회찬의 당선은 선거가 치러진 2004년 4월 15일을 지나 4월 16일 새벽 2시30분 경 확정되었다. 노회찬은 당시 10선을 노리던 김종필을 누르고 17대 국회의 마지막 당선자가 되었다.

  • 돋보인 초선 국회의원

    노회찬은 2004년 9월 호주제 폐지를 위한「민법 개정안」을 발의하고, 2005년 9월「장애인차별금지법 제정안」을 발의했으며 두 법안은 17대 국회에서 본회의를 통과해 여성과 장애인의 권리 확대에 큰 획을 그었다. 또한, 노회찬은 2006년 “법 앞에 만 명만 평등하다”는 명언을 남기며 ‘전관예우’, ‘유전무죄-무전유죄’로 대표되는 사법 현실에 맞섰으며, 중소자영업자들에 대한 부당한 신용카드 가맹점 수수료 제도를 개혁하는데 앞장섰다. 조선왕조실록 환수위원으로 활동해 조선왕조실록이 환수되는 데에도 기여했으며, 격무에 시달리는 소방공무원들의 노고를 기리기 위한 소방공무원 처우개선 입법에서도 성과를 이뤄냈다.

  • 2005
    삼성X파일 떡값검사, 명단 공개

    노회찬은 2005년 8월 18일, 법제사법위원회에서 거대권력인 재계와 검찰, 언론 사이의 부정한 결탁을 끊고 국민의 알권리를 실현하기 위해 “안기부 불법도청 녹취록”인 소위 “삼성X파일”에 담긴 ‘떡값검사 명단’을 공개했다.

  • 2008
    노회찬마들연구소 창립

    노회찬은 2008년 총선 직후 서울시 노원구에서 <노회찬마들연구소>를 창립해 ‘명사초청 월례특강’을 41회 개최하는 등 지역주민들과 함께 하는 정치활동의 모범을 만들어냈다.

  • 2012
    19대 총선의 압도적 당선과
    의원직 상실

    노회찬은 2012년 4월 11일 19대 총선에서 57.2%라는 압도적 지지로 당선되었다. 그리고 노회찬은 경제민주화 법안들을 다룰 국회 정무위원회 활동을 시작했다. 노회찬은 재벌대기업의 지배구조 민주화를 위한 입법 활동뿐만 아니라 대기업의 갑질횡포를 당하는 중소기업들, 금융기관들에 의해 부당한 피해를 당하고 있는 국민들의 경제적 피해를 방지함으로써 국민들이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경제민주화 입법을 추진했다.
    그러나 노회찬은 7년간 진행된 ‘삼성X파일 떡값검사 명단 공개 사건’ 재판결과 2013년 2월 14일, ‘보도자료를 배포한 것은 국회의원 면책특권에 해당하고 그것을 홈페이지에 게시한 것은 면책특권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취지의 시대착오적 판결로 국회의원직을 상실했다. 노회찬은 “그 순간이 다시 온다 하더라도 똑같이 행동할 것”이라고 말하며 국회를 떠났다. 이후 대법원은 같은 사건의 민사소송에서 ‘떡값검사 실명공개’의 공익성을 인정하며 무죄판결을 내렸다.

  • 2016
    20대 총선에서 진보정당
    최초의 3선 국회의원 당선

    노회찬은 2016년 4월 있을 20대 총선에 출마하며 “노동이 존중되는 선진복지국가를 실현하는데 몸 바치겠다”고 외쳤고, 경남 창원시 성산구에서 진보정당 최초의 3선 국회의원이 되었다.
    노회찬은 2016년 5월부터 2년여 동안 정의당 원내대표였으며, 2018년 4월 결성된 공동교섭단체 ‘평화와정의 의원모임’의 첫 원내대표를 맡았다. 노회찬은 정리해고제한법(근로기준법 개정안),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산업재해보상보험법 개정안 등 노동자의 권리와 안전을 강화하는 법안과 신용카드수수료 인하법(여신금융업법 개정안), 대형복합쇼핑몰규제법(유통산업발전법 개정안) 등 중소자영업 보호 법안을 발의했으며, 장애인에 대한 관광차별 금지법(장애인차별금지법 개정안) 개정을 실현하는 등 열정과 경륜으로 사회 약자들을 대변했다.
    또한, 노회찬은 20대 국회 최초로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설치법을 발의하고, 제왕적 대법원장체제 개혁방안을 제시하는 등 검찰개혁과 사법개혁에도 앞장섰으며, 국회 특수활동비 폐지를 제기해 실현시키는 등 정치개혁에서도 모범적인 의정활동을 전개했다.

삶 속의 키워드

어머니

노회찬은 어머니를 가장 존경했다. 어머니는 1980년대 말 노회찬이 노동운동으로 감옥에 있는 동안 174통의 편지를 보냈고, 20년 동안 아들과 함께하기 위해 노동과 진보정치 관련 기사를 모아 손수 스무 권의 스크랩북을 만들었다.

노회찬은 “모든 사람들에게 어머니는 존경의 대상이죠. 다만 제가 걷는 길은 밖에서 보기에 손해를 보는 길, 위험해 보이는 길이었기 때문에 어머니도 처음에는 걱정하시며 만류했어요. 하지만 나중에 제 결심이 굳다는 걸 아시고는 격려해주셨죠. ‘힘들더라도 옳다고 하면 그 길을 가라. 막지는 않겠다.’라고 하셨는데 정말 큰 힘이 됐습니다.”고 말했다.

3.8 세계여성의날과 노회찬

노회찬은 2005년부터 2018년까지 14년 동안 ‘3‧8 세계여성의날’ 기념 <장미꽃과 축하편지>를 여성노동자 등 각계각층의 여성들께 전하며 한국 사회의 성평등 실현을 스스로 다짐하며 여성차별 해소와 여성권리 확대를 주장했다.

2018년 노회찬은 “최근 미투 운동을 통해 권력의 힘으로 강제된 성적 억압과 착취가 침묵과 굴종의 세월을 헤치고 터져 나오는 현실을 보며 정치인으로서, 한 여성의 아들이자 또 다른 여성의 동반자로서 부끄러운 마음을 감추기 어렵습니다.”라고 고백했다.

<대한민국 인권상> 등 수상

노회찬은 2004년 ‘전태일문학상 특별상’을 수상했으며, 2005년 ‘호주제 폐지 감사패’, ‘친일재산환수법 통과 감사패’, 2006년 ‘한글을 빛낸 큰별’, 2007년과 2017년 백봉신사상 등 의정활동 관련 많은 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노회찬은 2018년 12월 대한민국 인권상(국민훈장 무궁화장)과 민주언론상 특별상을 수상했다.

평양냉면

끝으로, 노회찬은 평양냉면을 너무나 사랑했던 자유인·평화인·문화인이었다.


공유하기

페이스북에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에 공유하기
트위터
카카오톡에 공유하기
카카오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