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단 소식
민들레(7호) 어둠의 또아리 속으로 같이 걸어 들어갔던 친구여 - 이종걸 (국회의원)
© 사진 이상엽
- 이종걸 (국회의원·더불어민주당)
나한테는 친구이면서도 때로는 일찍 철든 형 같았고, 때로는 모르는 것이 없는 운동권 선배 같았던 그가 떠난 지 벌써 1년이 훌쩍 지났다. 세상은 그의 생전보다 더 많은 흉흉한 사건들이 터지고 있고, 국회는 갈등의 도가니가 되어가고 있다. 그는 평생 진보를 추구했지만, 진보는 정녕 더디게 더디게 진행되고 있다. 아니 정녕 앞으로 나아가기는 하는 것인가?
촛불시민혁명의 열기와 기대를 모아서 출범한 문재인 정부가 난관에 봉착하고 있다. 현실이 교착되면 온갖 나약한 생각이 든다. 그가 살아 있다면 현 정세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그는 진보적 낙관주의를 전혀 흐트러뜨리지 않을 것 같다.
세월의 까마득한 저편에 있는 서울 화동의 경기고등학교 교정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내 기억 속의 그는 항상 낙관적이었다. 10대 소년들에게 ‘10월 유신’으로 그 폭압성을 더해가던 박정희 철권통치는 분노만큼이나 공포스러웠을 텐데, 그는 겁을 내지 않았다. 도저히 무너질 것 같지 않게 단단하고 거대해 보였던 그 파쇼의 철옹성 앞에서도 절망하지 않았다.
나는 아직도 그가 평생 내 앞에서 보여줬던 ‘진보적 낙관주의’의 근원을 잘 모르겠다. 그는 상황을 단순하게 보는 낙관주의가 아니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신중했고, 복합적으로 사고했고 치밀하게 타산하는 타입이었다. 그러기에 나는 그의 낙관주의가 놀랍고 부러웠다.
고등학교 시절 우리는 ‘反유신 고등학생’이었다. <창작과 비평>도 읽고, 명동성당과 종로5가 기독교회관 등에서 열렸던 함석헌, 백기완 선생의 시국강연도 같이 다니면서 점차로 의식화되었다. 그 무렵 우리가 가장 치밀하게 준비했던 일은 유신 반대 유인물을 비밀리에 교내에 살포하는 것이었다.
당시 유신체제 하에서 유신 반대 유인물을 뿌린다는 것은 대단한 모험이었다. 적발된다면, 본인의 인생은 물론 집안도 풍비박산을 각오해야 할 만큼 가혹한 탄압이 따르는 ‘대역죄’로 취급되었던 것이다. 나는 겁이 많았던 편인데, 그가 설득하고 앞장섰기 때문에 가담했다. 그만큼 그때부터 나에게 그는 참 신뢰할 수 있는 친구였다.
당시에는 통행금지가 있었다. 학교 업무가 완전히 종료된 후 통금 전까지 짧은 시간에 배포해야 했다. 우리는 교실 문을 열어서 배포 장소를 마련하는 역할과 실제로 유인물을 살포하는 역할로 나눴다. 문을 따는 데에는 시간이 많이 걸려 순찰하는 교직원에게 적발될 수 있지만, 몸에는 아무런 유인물도 소지하지 않았기에 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고, 유인물 배포조는 짧은 시간에 배포할 수 있기에 적발 가능성이 적다는 계산으로 역할을 나눈 것이다. 그런 용의주도함으로 배포는 성공했다. 우리는 다른 고등학교로 반유신 투쟁이 번질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갑자기 석유파동 때문에 조기방학을 하게 되면서 다른 학교로 확산되지 못했다. 지금도 아쉬움이 남는다.
그 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스무 살이 되고 서른 살이 되고 마흔 살이 되고 육십이 넘는 동안, 그와 나는 대학은 달라도 학생운동의 동지로, ‘양심수’와 변호사로, 도망자와 숨겨주는 사람으로, 노동운동 대표와 정당인으로, 진보파 정치인과 개혁파 정치인으로 위치를 바꾸면서 다시 만났다. 그는 진보의 외길로 일관되었지만, 나는 생각도 위치도 변했다. 그러나 그는 나를 신뢰하고 나의 생각을 존중해줬다.
그에 대한 나의 믿음, 그가 나에게 보내줬던 우정은 고등학교 때 형성된 것이다. 그 칠흑 같은 경기고 교정의 어둠, 나는 교실 문을 따서 열어놓고 나오면서 유인물을 뿌리러 그 어둠 속으로 다시 들어가는 친구의 모습을 보면서 느꼈던 동지애는 나의 의식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 사진 이종걸 의원실 제공
생각은 달랐지만 서로를 존중하는 관계였던 한없이 좋은 벗이었던 그. 나에게 그는 유연하고 열린 진보의 상징이기도 하다. 고교시절 그는 첼로를 나는 피아노를 연주할 수 있었다. 이제는 손이 굳을 대로 굳어서 초보적인 곡도 무수한 연습을 해야만 연주할 수 있을 것이다. 몇 년 전에 민주당에서 국정 국사교과서 반대 문화제 행사를 하면서 원내대표로 피아노 연주를 할 기회가 있었다. 손 따로 마음 따로여서 정말로 고생했었다. 그때 문득 그와 내가 더 나이 들어서 정치 현역에서 떠나게 되면 다시 집중 연습을 해서 협주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이제 그 꿈은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그와 하고 싶은 다른 꿈, 더 인간적인 세상을 만들자는 꿈은 부족하나마 나라도 이어가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