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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 소식

민들레(10호) 존경하는 친구, 노회찬을 그리며 - 김석준 부산광역시 교육감

재단활동 2020. 02. 28



 

노회찬, 

그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중3 초였다. 내 인생 첫번째 도전이었던 부산중 시험에서 낙방하여 동아중을 다니던 나는, 마침 동아중 선배가 부산고에 수석합격한 데 고무되어 부산고 수석합격이라는 당찬 목표를 세웠다. 그리고 부산중에서 공부 잘하는 친구에 대해 수소문해 보니 노회찬, 박 모, 권 모, 이 모 등이 선두권을 이루고 있다고 했다. 이 때부터 얼굴도 모르는 노회찬은 나의 라이벌이 되었다. 그런데 중3 후반기에 들어 다시 수소문해 보니 이들 넷은 모두 경기고로 가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갑자기 '닭 쫓는 개'가 된 기분이었지만 서울 갈 엄두를 낼 수 없었던 나는 오히려 라이벌들이 줄어들어 안도감이 들기도 했다. 결국 수석은 못했지만 괜찮은 성적으로 부산고에 입학했고 나름 열심히 해서 서울대에 합격했다. 대학에서는 앞의 박 모, 권 모, 이 모 등을 만나 활동을 같이 하기도 했는데, 노회찬은 만나지 못했다.


노회찬, 

그의 존재를 다시 확인한 것은 1980년대 후반 인민노련 활동가를 통해서 였다. 대학시절 같은 써클에서 활동하던 선후배의 상당수가 인민노련에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그들을 통해서 노동자보다 더 노동자 같은 노회찬의 활약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운좋게 1983년부터 부산대 교수가 되어 부산지역에서 1986 ~ 87년 대학교수 서명운동을 주도하고 부산경남민주화교수협의회(=민교협) 총무로 활동하면서 나름대로 진보적 지식인으로 자부하고 있던 나로서는 용접노동자 노회찬의 소식은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1990년대 들어서 진보정당추진위(=진정추) 활동을 포함한 노회찬의 진보정치 행보는 나에게 새로운 과제를 던져 주었다. 


노회찬, 

그를 실제로 처음 만난 것은 '국민승리 21' 의 대선후보 선출 행사장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그 이전에도 이런 저런 통로와 활동을 통해 서로의 존재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막상 처음 만나고 나니 마치 오랜 친구처럼 가깝게 느껴졌고 그래서 더욱 격하게 의기투합하게 되었다. 첫 만남 이후 2000년 민주노동당 창당, 2002년 지방선거, 2004년 17대 총선, 2006년 지방선거에서 우리는 활동하는 지역과 역할은 달랐더라도 늘 한 편이었다. 특히 200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민주노동당 대선 후보를 선출하는 과정에서 나는 노회찬후보 선대본부장을 맡았다. 그런데 2007년 민주노동당의 대선 후보는 권영길 대표로 결정되었고, 선거에서는 참패했다. 이후 나는 노회찬, 심상정, 조승수 등과 함께 진보신당을 만들었고, 창당 1달만에 실시된 18대 총선에서 선대위원장을 맡았야 했다. 이런 일들을 하기 위해 나는 교수로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얻은 안식년(2007년 하반기~2008년 상반기)을 몽땅 쏟아 부어야 했다. 이후 일련의 과정을 거쳐 2011년 통합진보당이 결성될 때에도 고민 끝에 노회찬, 심상정, 조승수 등과 함께 참여했고, 2012년 19대 총선후보로도 나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도중에 건강에 문제가 생겨 후보를 사퇴하고 나아가서 통합진보당에서도 탈당을 하였다. 여기까지가 노회찬과 함께 했던 정치적 동행이었다. 

이후 나는 2014년 지방선거에서 부산시 교육감으로 당선되어 노회찬과는 활동의 장을 달리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회찬은 같은 시대를 같은 방향에서 바라보면서 고민하고 실천해온 가장 가까운 친구이면서 동시에 내 삶을 비추어보는 거울 같은 존재였다.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살면서도 늘 여유 있게 주변을 챙기고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가능하게 만들어 내던 노회찬. 사방을 둘러보아도 어디 한 군데 희망을 찾기 어려운 지금, 그의 넉넉한 웃음과 정신 번쩍 들게 하는 한마디가 더욱 그립다.

친구야, 잘 지내고 있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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