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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 소식

민들레(13호) 음식天國 노회찬 <10> 강서구 원당곱창

재단활동 2020. 05. 28

- 이인우(한겨레 기자)



1.
서울 서쪽 끝 강서구 원당사거리에 곱창집이 있다. ‘원조 원당곱창’(가양1동 강서로379). 지하철5호선 발산역 2번출구로 나오면 바로 간판이 보인다. 2000년대 초반부터 노회찬이 사랑한 맛집의 하나이다. 원당곱창은 곱창 자체의 맛을 중시한다. 그러려면 재료에 퀄리티가 있어야 한다. 굽는 방식은 센 불에 빨리. 잘 구운 곱창을 씹으면 고소함 속에 진한 곱이 풍성하게 입안을 적신다. 노회찬도 정치하는 사람인지라 조금 더 써서 “전국에서 가장 맛있는 곱창집”이라고 엄지척을 했다. 김학서(62)·한옥보씨 부부가 2002년부터 18년째 운영하고 있다. 가게는 전형적인 동네 곱창집의 면면을 갖추고 있다. 크고 단순한 원색의 명조체 간판, 둥근 드럼통테이블, 낙서 가득한 벽에 구식이 분명한 인테리어와 메뉴판…1990년대 후반이나 2000년대 초반 배경의 ‘응답하라’ 시리즈에 등장하면 딱일 것 같은. 원당곱창집이 노회찬과 인연이 닿은 것은 ‘노회찬사람들’이 이곳 강서구에 진보정치의 새 둥지를 틀면서부터이다.







강서 양천향교 뒷산이 궁산(宮山)이다. 꼭대기에 소악루(小岳樓)라는 정자가 있다. 76m의 얕은 구릉이지만 한강은 물론 서울이 훤히 바라다 보인다. 이 전망 좋은 곳에 1990년대 후반 어느쯤부터 한 중년남자와 2030젊은이들이 종종 나타난다. 지금은 어림없는 일이지만, 그들은 밤이 이슥하도록 무엇인가를 심각하게 토론하고, 때로는 한 잔 술에 불온한 노래들을 목청껏 불러대는 호연지기를 과시한다.  젊은 축으로는 이재영(2012년 타계한 사회주의 운동가) 등이, 중년세대로는 노회찬이라는 ‘리더’가 있었다. 혹시 이 글을 읽는 사람 가운데 빙긋이 웃으며 나도, 라고 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 궁산 자락 아래에 대한민국 진보정당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현장이 있다. 1996년부터 2008년 노회찬이 지역구를 노원으로 옮기기 전까지 진보정치연합 서울본부가 되고 진정련(진보정치연합) 중앙당사가 된 곳. 말하자면 국회의원 선거구 기준으로 서울 강서을 지역은 노회찬과 그의 사람들이 ‘진보정당 건설’이라는 이상을 향해 새로운 항해를 시작했던 곳이다. 

1995년 12월 어느 추운 겨울날 “한 때 서른 명이 넘었던 (진보정치) 상근자들이 뿔뿔히 흩어지고” 마지막 남은 한 명(이재영)과 노회찬은 진정추 시절부터 꾸려온 짐을 싸들고 강서구 내발산동 좁은 사무실에 들어섰다. “꿈이 있기에 기죽지도 힘들지도 않았던” 그때로부터 5년 뒤 역사적인 민주노동당이 창당됐다.(2000년) 그리고 4년뒤 17대 총선에선 한국정치사상 처음으로 진보 정당이 한번에 10석의 의석을 확보하는 기적이 창조됐다.(노회찬은 선대본부장으로 민노당의 역사적 승리를 지휘하면서 비례대표 8번으로 당의 10번째 의석을 채웠다.)


2.
원당곱창에서 음식천국노회찬과 함께 잠시 그 시절로 돌아가본 분들은 한쌍의 부부와 한 분의 인테리어 목수이시다. 세 분 모두 1990년대에 진보정치운동을 매개로 노회찬과 인연을 맺었다.

부부의 남편 구준회씨(아이쿱생협 근무)는 1998년 진보정치연합 강서지역 상근활동가로, 부인 서수진씨(동부여성발전센터 근무)는 이듬해 진보정치연합 회원활동을 시작하면서 노회찬과 만났다. 두 사람은 회원 모임에서 눈이 맞았다. 2003년 결혼식 주례는 당연히 노회찬(부인 김지선씨와 공동주례를 섰다)이었다. 실내인테리어 목수 김기문씨는 1992년 2월 백선본(백기완선거대책본부) 구리지역 홍보부장으로 처음 노회찬을 알게 되었다. “감옥에서 막 싱싱한 x이 나왔다고 다들 궁금해 했다”며 인민노련(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 1987년 인천지역을 중심으로 조직된 민중민주계열(PD) 노동운동 조직. 2000년 민주노동당 창당에 이르는 진보정당 설립 운동을 주도했다) 사건으로 3년 가까이 복역하고 출소한 36살의 청년 노회찬을 회상한다. 김씨는 결혼 후 구리에서 강서구로 이사를 했는데, 노회찬이 강서에 진을 치게 되면서 인연을 이어가게 됐다.

“그 시절 우린 모두 지독한 회의주의자들이었죠. 남들이 보면 별것 아닐 수도 있는 주제로 10시간씩 토론하곤 했으니. 밤샘회의 뒤엔 종종 새벽술을 마시곤 했는데 한번은 물었어요. 어떻게 그렇게 잘 마시냐, 보통 나이가 들면 주량이 줄어드는데. 그랬더니 그가 그러대요. ‘해당 나이만큼 최선을 다한다’.  그 새벽술이 제일 많이 생각납니다.”

“회원이 되고 1년쯤 지나 당시 노의원집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거실에 걸린 그림을 보고 깜작 놀랐어요. 제(서수진)가 미대출신이거든요. 탄광촌 화가로 유명한 황재형의 탄광노동자 그림이었어요. <사회평론>에서 출간한 <길을 찾는 사람들>이란 진보적인 시사잡지 창간호 표지를 장식했었죠. 그 그림을 화가 재료값 보탠다며 거금 100만원을 주고 샀다고 해요. 다 같이 어려운 시절이라 작가도 무척 고마워했을 것 같았습니다. 지금은 아마 엄청 비쌀걸요?”(그 그림은 국회의원실을 거쳐 현재 노회찬 재단에 걸려 있다.)

노회찬은 음악은 물론 그림에도 조예가 깊었다. 의원시절 외국을 방문할 기회가 있으면 그 곳의 박물관 뿐만 아니라 미술관도 빼놓지 않고 들렀다. 부부 동반으로 네덜란드 헤이그를 방문했을 때는 마우리츠하이스왕립미술관에 들러 명작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를 ‘직관’하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나중에 취미로 그림공부를 시작한 부인 김지선씨에게 이 그림의 모사를 격려했는데, 원화 못지않게 잘 그려내자 노회찬은 그 그림을 의원실에 걸어놓는 불출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 그림도 또한 노회찬 재단이 보관하고 있다).

ⓒ 일러스트 김경래



3.
노회찬이 무연고의 강서를 진보정치의 출발지로 선택한 것은 반쯤은 우연이었다. 노회찬이 이끌던 진정추 등 진보정치연합(공동대표 노회찬, 김철수)은 1995년 대의원대회를 통해 시민운동 진영과 함께 개혁신당에 합류해 15대 총선에 참여하기로 결정한다. 15대 총선이 끝나면 거기서 나와 진보정당 재창당에 나선다는 조건부였다. 이 개혁신당은 보수정치인 이기택이 이끌던 통합민주당(속칭 꼬마민주당)과 연합하게 된다.(이 정치 실험은 "정치에 대한 철학과 세계관의 차이"로 총선 전에 진정련이 ‘개혁신당’에서 철수함으로써 실패로 돌아갔다.)

아무튼 당시 인천에 살던 노회찬은 연합전선 구축에 따라 1996년 15대 총선에서 서울 양천갑에 출마하려고 했다. 그러나 당시 경실련 서경석 사무총장과 출마 지역이 겹치면서 양천갑을 양보하고 대신 찍은 곳이 강서을이었다(당시 강서양천 지역은 수도권 접경지역으로 노동자 인구가 많아 상대적으로 진보정당에 유리할 것으로 판단되고 있었다.)

노회찬이 강서로 오면서 그의 선거사무실은 자연스레 진보정치연합 서울본부를 겸하다가 나중에서는 진정련 중앙당사 역할도 맡았다. 사실상 진보정당운동의 베이스캠프였다. “당시 서울과 수도권지역 진정추는 중구, 구로, 관악, 구리미금남양주 지역을 합쳐서 중구에 사무실을 내고 활동했는데, 이때 강서로 사무실을 옮기고 본격적으로 선거운동에 돌입했습니다. 서울지역 당원들과 한사노(한국사회주의노동자당) 멤버들이 모두 나서는 총력전 체제였죠. 선거준비를 위해 다니던 직장까지 휴직했던 홍승기, 마재필, 김영길, 최현수, 이명희…등등 많은 동지들이 생각나네요”

‘강서의 봄’을 캐치플래이즈로 한 노회찬의 선거캠페인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발상을 선보였다. ’모든 걸 보여드리겠다’는 어프로치는 대중들에게 아직은 낯선 노회찬과 진보정당의 이념을 친숙하게 알리는데 주목적을 두었다. 독일 진보정당의 선거홍보물을 참고해 광고대행사인 광고춘추(대표 김봉룡, 노회찬의 부산중 동기)와 독일유학파 지지자들이 만들었다. 노회찬의 모든 걸 보여주겠다는 약속답게 그의 인생역정과 정치이력, 이념 뿐 아니라 돌사진까지 등장했다. 준비했던 라스트신은 거의 누드나 다름없었고.

결국 사면복권이 안되어 출마 자체가 불발돼 애써 준비한 출정식은 해단식이 되고 말았다.(노회찬의 사면복권은 1998년 8월 15일에야 이뤄졌다.) 노회찬은 출정식에 참가한 주민들에게 ‘강서의 봄, 노회찬’이라고 쓴 야생화 씨앗봉투를 하나씩 선물했다. 그것이 정치인 노회찬의 첫번째 선거였다. 그때의 야생화 씨앗이 한국 정치판에 어떻게 발아하여 꽃을 피웠는지는 우리가 알고있는 바 그대로이다.






4.
노회찬이 민주노동당 사무총장으로 2002년 지방선거에서 민노당의 전국득표율을 8.13%로 끌어올린 것은 민노당의 성장에 획기적인 발판이 되었다. 국가의 정당보조금을 받을 수 있게 되었고, 무엇보다 민노당 대선후보의 TV토론 참여가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방송출연으로 노회찬은 예의 그 촌철살인으로 전국적인 스타가 되었다. 노회찬의 지역구 당선 여부가 정치적 관심사가 될 정도였다. 그러나 알다시피 노회찬은 지역구 출마 대신 비례대표를 선택한다. 17대총선(2004) 선거대책본부장으로 전체 선거를 지휘하게 되면서 자신의 당선보다 정당득표율을 높여 전체 의석을 늘이는 일이 핵심과제로 대두되었던 것이다.

노회찬의 비례출마로 비게 된 말 안장에 태울 기수가 필요해지면서 후보를 구하려는 불똥이 여러 곳으로 튀었다. 어렵사리 후보로 세운 기수는 당시 강서을 사무국장이던 김단성이었다. 그의 아내 홍승하는 영등포을 후보로 확정돼 일찌감치 선거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은 17대 총선에서 영등포을과 강서을에 각각 민노당 후보로 출마하게 된다. 당선에는 이르지 못했으나 부부가 같은 당 소속으로 나란히 출마한 사건은 당시 언론의 주목을 끌기도 했다.

노회찬 캠프에서 잊을 수 없는 또 한 사람은 온라인 닉네임이 ‘띨띨이 왕자’였던 우상택. 강서선본 정보통신팀에 상근하면서 노회찬의 온라인팬클럽을 다음카페에 개설한 운영자였다. 우씨는 노회찬 당선 후 ‘행복을 배달하는 노회찬과 친구들’ 초대 팬클럽 회장을 맡았다가  ‘국회의원 노회찬후원회’ 회장을 맡았다. 우리나라 국회 역사상 20대초반의 팬클럽 회장이 국회의원 후원회 회장이 된 일은 아마도 전무후무한 일이 아닐까 싶다. 박규님(현 노회찬재단 운영실장)의 회고, “당시 후원회장을 신영복 선생님께 부탁하자는 제안이 많았어요. 그때 노의원님은 그런 요청을 하는 것 자체가 선생님께 실례라고 말씀하셨죠. 노의원님 판단은 항상 옳았어요”


5.
꿈꾸는 자의 생활은 종종 고달프다. 강서의 생활이 그랬다. 구준회의 회고. 

“이쪽 일이 늘 그렇듯이 상근자 월급도 주기 어려울 때가 많았다. 노의원은 쪼들릴때면 나한테 그러셨다. 당신은 어디든 젓가락만 들고 가도 되는 사람야. (진보운동가로서) 어디에서든 열심히, 열정을 다해 사회주의의 가치를 설파하고 당당히 얻어먹어. 그러면서 자신은 어디에선가 돈을 마련해왔다.”(아마도 열심히 손을 비볐을 것이다) 사실 노회찬에게는, 한국에서는 도저히 가망없을 것 같은 좌파개혁가에게 돈을 빌려주는 착한(보통은 어리석다고 말하는) 친구와 친지들이 적지 않았다.

“그 시절 노의원이 한 십여일 사라졌다가 나타난 적이 있어요. 아주 얼굴이 새까매져 돌아왔는데, 용접을 같이 배운 지인이 차린 공사판에 가서 용접일을 도와주고 왔다고 그래요. 그때 받아온 임금으로 잘 얻어먹었죠. 보투(보급투쟁)도 참 열심히 했어요.” 

그런 생활을 함께 겪으며 쌓인 동지들의 정은 두터웠다.
“설명절 연휴 중 하루는 꼭 노의원 집에 모여요. 20명 전후의 맴버들이 모여 저녁을 같이 했습니다. 노의원은 집안의 술을 죄다 풀고, 부산 어머니가 만들어서 보내주신 가자미 식혜, 문어숙회 등을 자랑하듯 내놓았고요.” 이 모임은 나중에 노원으로 지역을 옮긴 뒤에도 계속됐다.

노회찬은 돈없음, 내지 부족함을 생활에 최적화시켜 사는데 이골이 난 사람이다. 아주 알뜰하다. 빌려온 영화비디오 하나도 내용을 완전히 소화할때까지 제때에 가게에 반납한 적이 없었다.

“우리 부부가 결혼할 때 노의원 부부에게 공동주례를 부탁하면서 감사표시로 두 분에게 넥타이와 스카프를 선물했어요. 그런데 국회의원이 되고 난 뒤 텔레비전에 비치는 모습을 보니까 나올때마다 그 넥타이를 하고 계세요. 단벌 양복, 낡은 구두로 유명하셨지만, 제게는 그 넥타이를 늘 매주시는게 그렇게 고마웠습니다.”

노회찬이 단벌신사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두세 벌은 되었을 것이다. 그가 사입은 가장 비싼 양복은 2007년 대선 예비경선때 입고 나가려고 산 사십몇만원짜리. 평소에는 고급 브랜드 옷이 필요없는 이유가 옷걸이가 좋은 때문이고, 한번 입은 양복을 오래 입는 것은 그만큼 옷 고르는 안목이 높기 때문이란다. 구두는 두 컬레를 번갈아서. 그 중 비싼 쪽이 12만원하던 리갈. “이래뵈도 우린 구두 하나는 좋은 거 신습니다.” 농담도 진담처럼 잘 한 신사였다.





6.
원당곱창 사장님께 18년 장수비결을 물었더니 “고지식한 아내”를 꼽는다. “아내가 나보다 고집이 세요. 괜히 변형을 주지말자, 조미료 쓰지말자, 정통대로 가자. 그랬더니 노의원님 같은 미식 손님들이 먼저 알아주시더군요.” 그래도 좋은 맛의 노하우는 있을 것 같아 물어보니 “노하우 없는게 노하우”란다. 있다면 좋은 재료를 쓰는 것. 재료시장에서 원당곱창 김사장은 까다롭기로 유명하시단다. “다른 음식도 마찬가지지만 곱창은 재료에 더 신경을 써야 합니다. 싱싱한 재료를 쓸만큼만 가져와서 회로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잘 손질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죠. 맛이요? 나중에 굽다보면 수분과 곱 다 나옵니다.” 노회찬에 대한 인상도 물어봤다. “우리 부부 똑같은 생각입니다. 참 큰 사람이다. 보통 손님들 안쪽 자리 좋아하는데 그 분은 늘 문간 자리를 택해요. 오가는 손님들이 인사하면 다 받아주고, 다 들어주고.”





원당곱창집을 나와 맥주집에서 입가심하고 12시가 다 되어서야 전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엉뚱하게 영화 한편이 머리 속을 맴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멜로영화. 슬프도록 찬란한 시절이 그리울 때면 불꺼진 방에서 혼자 청승을 떨며 보는 영화. 세상의 온갖 사랑의 순수를 모아놓아 제목조차 <클래식>. 왜 하필 오늘 클래식일까…

“전국적으로 만 명의 대학생이 공장으로 들어가 노동자가 되었던 시절이 우리에게도 있었다. 그 때의 꿈과 그 때의 로망, 그런 것들을 온전하게 꺼내서 이 시대에 다시 평가받게 해주고 싶다. 한국의 좌파, 그 길고 긴 여정을 통해서 어떻게 우리가 생겨나게 된 것인지, 그 역사를 온전하게 21세기로 가지고 오고 싶다. 노회찬의 팬으로서, 노회찬과 그의 친구들이 젊은 시절 모든 열정을 바쳤던 ‘인민노련’에 대해 책을 쓰고 싶다" (우석훈, <논객들, 노회찬에게 묻다-진보의 재탄생>(2010)에서.)

지금 노회찬은 없고, 노회찬이 없는 당은  진보정치의 불씨를 안은 채 흔들리고 있다. 

노회찬, 그때 궁산은 밤하늘의 별과 얼마나 가까왔는가? 그대와 그대의 새로운 젊은 친구들을 따라서 다시 궁산에 오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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