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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 소식

민들레(14호) 음식天國 노회찬 <11> 을지로 안성집

재단활동 2020. 07. 02

- 이인우(한겨레 기자)


1.
재개발 사업을 앞둔 을지로3가와 청계천3가 사이 기계부품상가. ‘착한임대료운동에 적극 동참해주세요’ ‘소상공인 죽어간다 생존권을 보장하라’는 플래카드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려 있다. 골목풍경이 한층 을씨년스런 6월 어느날 저녁 일단의 중년들이 이 골목의 유서 깊은 식당 <안성집>에 모였다. 노회찬재단의 연락을 받고 전국 여러 곳에서 불원천리하고 올라온 노회찬의 오랜 ‘동지’들이다. 이들은 모두 2007년 대통령선거에서 노회찬을 민주노동당 대통령 후보로 만들기 위해 뭉쳤던 기억을 공유하고 있다. 이 정도만의 정보로도 면면을 대략 짐작할 수는 분들도 있을 것 같다. 가나다 순으로 민주노동당 서울시당위원장을 지낸 박치웅(현 노회찬재단 운영위원), 노회찬캠프 정책기획 담당 윤영상(현 정의정책연구소 선임연구위원), 대전충남지역 이재기(현재 약초재배 및 채취), 대구지역 이연재(현 정의정책연구소 정책자문위원), 강원지역 임성대(현 정의당 강원도당 부위원장), 정의당 대변인을 지낸 정호진(현 노회찬재단 운영위원) 등등. 노회찬재단 김형탁 사무총장과 박규님 운영실장도 자리를 함께 했다.

이들은 일명 ‘전국모임’이라는 이름으로 노회찬과 계속 함께해 왔다. 몇 차례에 걸친 진보정당의 분열 과정에서 이 모임을 떠났던 몇분도 2018년 7월 노회찬의 서거를 계기로 다시 합류했다. “욕할 땐 하더라도 일년에 한번 정도는 서로 얼굴이라도 보며 살자.”



ⓒ 일러스트 김경래



2. 
안성집은 을지로 일대에서 돼지갈비와 육개장 맛이 으뜸이기로 소문난 집이다. 1957년 개업했다고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1969년경부터이다. 조선옥에서 일을 배운 최전분(82) 할머니가 30대 초반에 개업했고, 나중에는 성장한 아들이 가게 운영을 맡았다. 일반적인 육개장은 고춧가루를 많이 넣어 걸쭉하고 얼큰한 국물에 고사리와 당면이 추가된 형태가 보통이지만 이 집 육개장은 국물맛이 맑고 칼칼한 것이 특징이다. 고사리나 당면도 쓰지 않는다. 서울식 육개장이라고 구분하기도 한다.  칼칼한 국물에 말은 밥에 깍두기 하나 얹었는데도 수십년 동안 문전성시를 이뤘다. 1997년도 어느 신문의 음식전문인 듯한 기자가 쓴 깔끔한 기사가 20여년째 가게 문에 붙어있다. 아마도 안성집 육개장 비결을 가장 정확히 소개했다고 주인장이 판단한 듯하다. 

“사골 양지 갈비뼈 등을 커다란 가마솥에 넣고 4~5시간 끓인다. 중간에 거품과 기름을 걷어낸 후 너무 진해지지 않게 국물 일부는 퍼내고 물을 조금씩 부으며 또 우려낸다. 고춧가루는 뼈 우릴 때 함께 넣어주는 것이 비결이라고 한다. 그래야 칼칼하면서도 맵지 않고 시원한 맛이 우러난다. 소금과 다른 양념도 이때 같이 넣어 간을 맞춘다.”

안성집 육개장의 차별성은 창업자가 소갈비집에서 먼저 음식을 배운 탓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기름진 고기를 먹고 난 다음 후식으로는 냉면이 제격이듯, 육개장도 냉면처럼 맑고 시원한 국물이면 속이 더 개운할 것이란 착상이 안성집 육개장을 탄생시켰을 것이다. 부산한 을지로 골목 안의 이 맛을 노동운동가 출신의 미식가가 놓칠 리 없었다. 

노회찬은 안성집에 올 때 마다 화덕에서 열심히 돼지갈비를 초벌구이 해주는 최전분 주인 할머니를 어머니 모시 듯 깍듯이 대했다. 
“손을 잡고 들어와 나를 옆에 앉히고는 꼭 술 한 잔 씩 따라주었지.. 어떻게 지내셨느냐.. 건강은 괜찮으시냐...시시콜콜할 법한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던 노의원님.. 그게 늘 고마워 고기 한 점이라도 더 내드리고 싶게 했던 분이 어느날 갑자기 가셔가지고는...” 






3.
‘동지’들이 일년에 한번 모일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약술이다. 충남의 이재기 ‘동지’는 약초꾼이다. 각종 약초로 담근 술을 가져와 시음할 기회를 주는데 안성집 모임에는 귀한 산삼주와 와송주, 하수오주를 선보였다. 필자에게는 모두 처음 맛보는 귀한 술이다. 특히 산삼주라니. 식탁 한켠에 노회찬의 자리도 마련해 한 잔 따르고 산삼주로 건배를 외치니 산신령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다.

모처럼 한자리에 모인 이들은 스스로의 공통점을 이렇게 정리한다. 첫째 다같이 범피디 계열이지만, 운동의 출발지는 각각이다. 둘째, 2007년 민주노동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노회찬캠프를 함께 했다. 셋째, 노회찬을 지지했지만, 맹지(맹목적 지지)가 아니라 생각이나 방향이 다를 땐 맹렬하게 토론하고 싸우고 심지어 갈라서기도 한 사람들이다.

“진보정당 노선에 동의해 한사노로 합류한 조직 중에 ‘노동계급’(「현실과 과학」의 이진경 진중권 등도 여기에 속했다)이라고 있었다. 나는 그 일원으로 한국사회주의정당준비위원회(한사노)가 만들어질 때 노회찬을 만났다. 이후 줄곧 노선을 같이하다가 노회찬이 통합진보당으로 갈 때 따라가지 않고 녹색당에 참여했다. 우리가 화해하고 다시 한 팀이 된 것은 2014년 노회찬이 동작을에 출마해 나경원과 맞붙게 되었을 때였다.”

“노회찬의 노선을 비판하고 공격하는 입장에서 처음 만났으나 곧 그에게 매료되었다. 노회찬을 당의 대선후보로 만드는데 앞장섰지만 진보신당을 탈당할 때는 다시는 보지 않겠다고 맹세했었다. 그가 그렇게 떠날 줄 알았으면 그렇게 오래 안 보진 않았을텐데…”

“케이티노조 출신이다. 노동조합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으나 참담한 실패였다.  2000년 민노당 창당을 함께 하면서 당시 서울시당위원장인 노회찬의 사람이 되었다. 그때 노위원장이 날더러 끝까지 함께 할 사람이라고 했다. 나는 조직운동의 관성대로 조직 내에서 내 뒤를 봐준다는 뜻으로 들었는데 알고보니 전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게 더 그를 좋아하게 만들었다.”

“강원도와 경기도 일부 충청도를 관할하는 비합법노동운동조직의 의장이었다. 소련이 붕괴된 후 조직내 혼란이 극심했다. 패닉 상태에서 운동방향을 놓고 고심할 때 노회찬을 만나 진보정당건설 노선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그는 내가 아는 한 남한 운동가 중 가장 뛰어난 조직가였다.”

“대구지역의 한 독자적인 피디그룹의 일원이었다. 백선본 선대위원장으로 대구에 온 노회찬과 만나 동지가 되었다. 진보정당운동에 관한 한 그는 포기나 좌절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우리와는 결이 다르다고 느꼈다.”

“국민승리21 때 처음 만났고 민노당 서울시당위원장하실 때 사무국장으로 모셨다. 동작을 보선 때 불과 9백여표 차이로 지는 바람에 나도 마음의 빚이 많았다. 정치인은 선택받지 못하면 유배라는 말이 오래 기억에 남아 있다.”






4.
2007년 민노당 대선후보 경선은 노회찬에게는 쓰라린 기억이었다. 여론조사에서 인지도나 지지도에서 모두 압도적으로 앞섰지만 결과는 최종경선에도 오르지 못한 충격적인 패배였다. 전국을 순회하며 후보들이 선거운동을 펼치고 당원들이 투표한 1차 예선 결과 1위 권영길 1만9053표(49.4%), 2위 심상정 1만64표(26.1%). 노회찬 9478표(24.6%)였다. 왜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일까.

“민노당의 가장 큰 병폐는 고질적인 정파주의였다. 알고 있다시피 민노당은 이념성향으로는 크게 민중민주(PD) 계열의 평등파, 민족해방(NL) 계열의 자주파로 나뉘고, 여기에 민주노총과 전국연합(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전농(전국농민회총연맹) 등이 들어와 있었다. 창당은 노회찬 등 인민노련 계열이 주도했지만, 당내 다수파는 나중에 합류한 엔엘 계열이었다. 일찍이 진보정당건설 노선으로 전환한 피디 계열은 운동조직의 외피를 거의 벗은 반면, 반독재민주화투쟁의 80년대식 운동노선을 고수한 엔엘계는 조직을 거의 그대로 유지한 채 당에 들어왔다. 민주노총도 국민파와 중앙파 등이 계파별로 뭉쳤고, 전국연합은 지역별로 뭉쳤다. 그러다보니 각종 당내 인선이나 정책결정에서 암암리에 조직투표가 횡행했다. 인물이나 정책보다 어느 계파냐가 사안을 결정하는 관건이 되기 일쑤였다. 일찍이 노회찬은 이런 당내 정파주의를 타파하고 않고서는 진보정당의 발전은 불가능하다고 봤다. 그래서 그 자신은 계파를 만들지 않았다. 많은 이들이 노회찬이 진보정치의 미래라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투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당시 후보로 나선 권영길, 심상정, 노회찬은 모두 성향으로는 피디계였다. 당내 다수파로 캐스팅보트를 쥐게 된 엔엘계는 자파에 유리한 후보를 살폈다. 언론노련 위원장(권영길은 서울신문 기자로 언론노조운동에 참여했다) 출신으로 민주노총 초대위원장을 지낸 권영길은 엔엘계와 가까웠던 민주노총 국민파와 전국연합이 공개적으로 지지를 선언했고, 민주노총 중앙파는 전노협 출신의 심상정을 밀었다. 당내 조직기반이 약한 노회찬은 정파들이 조직투표로 나오면 이길 수 없었다. 그것이 심상정 후보에게도 뒤진 결과로 나타났다. 참담했다.” 
“노회찬을 비롯한 진보정당 건설론자들은 비합법 운동이 합법정당으로 전환하면 과거 운동의 관성을 과감히 버리고 당 중심으로 사고하고 활동해야 대중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대개 피디 계열들은 80년대식 조직운동방식을 버리는 쪽으로 전환한 반면, 엔엘계는 80~90년대식 운동방식이나 노선을 고수했다. 이런 차이가 조직투표가 가능한 정파와 그렇지 못한 정파의 차이를 낳았다. 즉 노회찬 진영은 운동권정치의 극복을 진보정당 발전의 조건으로 본 반면 당시 엔엘은 운동의 연장선에서 정당정치를 운용하려 한 차이였다고 생각한다.”

2004년 총선에서 단숨에 10석을 얻고, 다음 총선에서 정당득표율 20%를 목표로 할만큼 급속하게 커진 당의 외형이 오히려 정파들의 권력욕을 자극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민주노동당의 정파주의를 고스란히 드러낸 2007년 대선후보경선은 결국 분당이라는 대폭발의 전주곡이 되고 말았다.


5.
“노회찬이라고 왜 계파의 유혹이 없었겠나. 그러나 그는 과거로 돌아가기를 거부했다. 보통사람 같으면 배신감이나 원망 때문에라도 옛날 같은 조직방식으로 돌아갔을 텐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때 그가 말했다. 진정으로 운동의 대의를 생각한다면 이 정도의 과정(계파갈등)은 기꺼이 이겨내야 한다. 이 과정을 돌파하지 못하면 그것이 우리 역량의 한계이고, 우리 운동에 최종적 실패가 있다면 바로 그 지점이다, 라고.”  

“지역 순회 투표를 할 때, 우리 지역에서 중간리더급 수십명을 노회찬과 연결시켜주려고 그에게 직접 지지 전화를 돌려달라고 요청했었다. 그런데 노회찬이 그걸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방송이나 인터뷰에 나와 대선후보로서 민노당이 어떤 세상을 만들고 싶어하는 지 열심히 설파해. 그걸 보고 우린 분통터져 했어. 저, 양반 저기서 뭐하는 거야, 선거를 모른다, 권력의지가 없다는 불만의 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왔어. 그런데 나중에 당이 돌아가는 걸보고서야 깨달았어. 노회찬은 그런 이벤트 기회를 자기보다 당을 위해 활용하고 있었던 거지. 이미 조직된 우리 편보다 조직되지 않은, 미래의 우리 편이 될 수 있는 노동자 서민대중을 큰 틀의 민노당으로 묶어내는 게 민노당 대선후보 예비경선의 본질적 목표로 설정하고 실천한 거지. 그런 점에서 노회찬이야말로 진정한  전략가이고 조직가였어.”

“우리가 그릇이 작았던 거지. 그가 높은 대중적 지지를 가지고도 끝내 자기 계파를 만들지 않은 이유를 정말 되새겨봐야 해.”


6. 
“2007년 대선후보로 나가 300만표 정도를 얻은 뒤 순차적으로 득표를 높여 2022년 대선에서 정권을 획득하자는 ‘15년 플랜’의 전제 조건은 정파구조의 청산이었다. 정파구조를 걷어내야 다양한 분야의 유능한 진보세력이 당에 유입될 수 있고, 그걸 바탕으로 명실상부한 제3정당으로 부상한 다음 집권에 도전한다는 그림이다. 이런 그림의 중심이 되어 줄 인물로는 노회찬 밖에 없다는 것이 우리 생각이었다.”
“15년 플랜의 1차 목표는 2007년 대선후보 경선에서 노회찬이 당선하는 것이었다. 최악의 걸림돌이 엔엘그룹의 조직투표라고 봤고 이를 막기 위해 혼신을 다했다. 그래서 전국연합의 일부 지역연합조직들을 설득하고 다녔는데 그만 일심회 사건이 터졌고, 엔엘계의 총단결론이 조직투표로 이어졌다. 부질없는 가정이지만 만약 일심회 사건이 없었다면 당시 선거양상도 달라졌을지 모른다.”

일심회 사건(2006.10.)을 통해 민주노동당 인사가 당내 인적 정보를 북한에 넘긴 사실이 드러나면서 당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2007년 대선 결과에 책임을 지고 민주노동당 문성현 대표체제는 일괄 사퇴한다. 그 직후 민주노동당은 심상정 비대위를 발족시켜 당을 혁신하고자 했으나 임시 당대회(2008.2.3.)에서 일심회 관련자 제명 등 당 혁신안이 부결되면서 비대위는 해체되었다. 얼마 뒤 노회찬 심상정 등이 탈당하면서 민주노동당은 분당의 길로 들어섰다.

“노회찬은 끝까지 탈당이나 분당을 막으려고 했다. 어떻게 만든 진보정당이냐, 이걸 깨고 다시 만들려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라며 주변을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피디 계열의 동지들이 선도탈당한 상태였고 추가 탈당의 압박이 거세지면서 결국 자신도 그 대열에 설 수밖에 없었다. 그가 비탄에 젖어서 ‘여러분, 나를 용서하지 마십시오’ 라고 외치던 말이 아직도 가슴에 절절하게 남아있다. 자기가 만든 당을 쫓겨나듯 떠나야 했으니 얼마나 비통했겠는가.”

“그러고 보니 올해가 민노당 창당 20주년인데 어디 한 곳 제대로 기념하고 평가한 곳이 없다. 서글픈 일이다.”





7.
50여년 역사의 안성집이 아쉽게도 6월30일로 문을 닫는다. 을지로 재개발 사업에 수용되면서 더이상 영업을 하지 않기로 했단다. 최 할머니도 아들도 “힘들어 그만한다”고 한다. 

최전분 할머닌 16살 때 고향 안성에서 친지집에 “서울귀경을 왔다가” 눌러앉게 되었다. 19살에 같은 골목 안의 유명한 한우갈비집인 조선옥에 들어가 갈비 재는 법을 배웠다. 30살에 결혼하고 이듬해인가부터 고향이름을 딴 안성집을 차리고 돼지갈비와 육개장을 팔기 시작했다. 최전분의 갈비와 육개장 맛은 금세 주머니가 헐한 상인과 손님들의 사랑을 받기 시작했다. 전성기 때는 2층의 70석까지 손님이 가득했다고 한다.

일행이 육개장으로 식사를 하고 산삼주에 소맥까지 다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선 시간은 9시가 넘어서였다. 골목은 어둠속에 가로등불만 가늘게 늘어져 있다. 주인할머니가 일행을 문밖까지 나와 전송한다. “이렇게 잊지 않고 찾아와줘서 반갑고, 우리집을 알아줘서 고맙다”며 연신 허리를 굽히시곤, 한참을 서서 멀어지는 우리를 바라보셨다. 을지로 안성집이 없어진다는 소식을 노회찬이 들으면 무슨 말을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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