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단 소식
민들레(15호) 음식天國 노회찬 <12> 여의도 안동국시 소호정
- 이인우(한겨레 기자)
1.
노회찬은 각별히 면(麵)을 사랑했다. 칼국수, 냉면, 잔치국수는 물론 짜장면, 소바, 파스타 등 국수 종류라면 모두 좋아했다. 아침을 거르는 식습관 탓에 하루 두 끼 중 한 끼는 거의 면음식이었다고 하니, 그에게는 국수가 주식이었다. 그의 발길과 미각이 거쳐 간 국숫집이 헤아릴 수 없고, 가보지 못한 세계의 다종다양한 국수는 지식으로 탐닉했다. 시간 있고 시대 분위기만 맞았다면 벌써 세상의 모든 국수에 관한 노회찬류의 '알쓸신잡'한 책 한 권쯤 나와 있을 것이다.
노회찬과 국수에 얽힌 많은 일화 가운데 '박근혜 탄핵 잔치국수'가 기억난다. 노회찬은 국회 구내식당에서 종종 점심을 하는지라 평소에도 구내식당 식단표를 눈여겨 살피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헌법재판소의 박근혜 대통령 탄핵 심판이 예정된 날(2017년 3월 10일) 점심 메뉴가 잔치국수라는 걸 알게 된 것. 그날 오전 헌법재판소에서 정말로 탄핵 결정이 나자, 노회찬은 보좌진들과 국회 구내식당으로 가서 탄핵 결정을 환영하는 의미에서 잔치국수를 나눠 먹었다. 당시 그는 이 장면을 트위터에 올려 화제가 되었다.
"잔치국수 드디어 먹었습니다. 오늘 점심 못 드시는 분 몫까지 2인분 먹었습니다. 매년 3월 10일을 촛불시민혁명기념일로 지정하고 잔치국수 먹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故 노회찬 전 의원의 2017년 3월 10일 트위터 갈무리.
당시 박근혜 대통령의 어이없는 행태가 심판받기를 원한 촛불 민심을 국회 식당의 잔치국수에 연결한 감각과 순발력은 감탄을 사기에 충분했다. 음식에 관한 지식과 감각이 있었기에 가능한 정치 이벤트였다.
2.
의정 활동이 벌어지는 여의도를 중심으로 보면 노회찬이 자주 찾은 국숫집으로 안동국시 '소호정' 여의도 분점(여의도 진미파라곤빌딩 1층)이 있다. 서울 양재동에 본점이 있는 소호정은 1980년대 압구정동에서 10평 남짓한 작은 칼국숫집으로 시작해 지금은 서울, 분당, 하남 등지에 15개의 분점을 거느린 대형 브랜드 칼국숫집으로 성장했다. 요식업계에서 손꼽히는 성공 신화 가운데 하나다. 여의도 소호정은 2008~9년께 문을 열어 국회의원을 비롯한 정당인, 의회 관계자, 기자들의 소규모 회합 장소로 사랑을 받고 있다.
"소호정은 노회찬 의원님이 보좌진이나 원내대표실 당직자들과 종종 점심을 하러 온 곳입니다. 워낙 국수를 좋아한다고 들어서 처음 점심을 같이할 때 저희가 먼저 이 집에 가자고 제안했어요. 이곳에서 기자간담회도 여러 번 갔었죠."
2020년 7월 초하루. 여의도 소호정에서 '음식천국 노회찬'을 함께한 식객들은 20대 국회 정의당 원내대표 시절 노회찬을 보좌한 원내 행정팀 식구들이다. 김종철 당시 정의당 원내대표 비서실장(현 정의당 선임대변인)을 비롯해 고문석 원내행정팀 부장, 한경석 원내행정팀 선임팀장, 이한샘 원내대표 비서실 부장과 노회찬재단의 김형탁 사무총장, 박규님 운영실장이 자리를 같이했다.
노회찬은 4년 임기의 3선 국회의원이었지만, 의정활동을 한 기간은 7년에 불과했다. 비례대표 의원으로 처음 국회에 진출한 17대는 분당 사태로 3년 7개월, 재선의 19대는 대법원이 '삼성 X파일' 사건 떡값검사 명단 공개를 유죄로 판단하면서 겨우 9개월 만에 의원직을 잃었고, 20대 국회는 그가 타계하면서 임기는 약 2년 2개월에서 멈췄다. 따라서 오늘의 식객들은 노회찬의 마지막 의정활동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들이기도 하다. 딱딱한 일 이야기 말고 특별히 기억에 남는 노회찬과 음식에 관한 기억만을 물어봤다.(오늘은 그가 타계한 슬픈 7월의 첫날 아닌가.)
"처음 노회찬을 가까이 모시면서 가장 궁금했던 것은 거의 모든 분야에 걸친 박식함의 원천이었어요. 도대체 매일같이 24시간이 모자라도록 바쁜데 언제 저런 걸 다 공부했을까, 저는 정말 궁금했어요."
"기본 탱크가 달랐다고 생각해야죠, 우리와는. 저수지 바닥의 넓이 차이 같은 것…."
"당신도 은근히 <알쓸신잡> 프로그램에 나가고 싶어 했지. '왜 날 안 부르지?' 그러셨어. 흐흐"
"음식에 관해서도 남달랐죠. 아는 것도 많지만, 먹는 행위나 과정 자체를 좋아하고 중시했던 것 같아요."
"당 워크숍으로 지방에 머문 적이 있는데 새벽까지 행사가 이어진 바람에 이른 아침 식사를 해야 했는데, 그 와중에도 골라주는 집에 그냥 가지 않았어요. 잠깐만, 잠깐만 그러시며 직접 핸드폰으로 검색하더니 앞장서는 거예요. 이미 음식점을 골라 놓았다는 걸 나중에 알았죠."
"부산 어느 시장으로 정의당 후보 유세 지원을 갔어요. 한 30분 가까이 사자후를 토하고 연단을 내려와서는 그길로 곧장 연설회장 건너편 어묵집으로 직행하는 거예요. 연설하면서 보이는 어묵 가게의 맛이 꽤나 궁금했었나 봐요. 연설하면서 그런 한눈팔기가 가능한 것도 신기하고. 음식에 관한 한 그런 면이 있는 분이었습니다."
"미각을 악기에 비유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악기는 어려서부터 배워야 나중에도 다룰 수 있듯이, 미각도 일찍부터 여러 가지 종류의 음식을 접해봐야 커서도 미각이 작동된다고요."
노회찬의 문화적 소양과 미각의 원천은 어머니이다. 어려서부터 아들의 시야를 넓혀준 어머니는 동네 부잣집에 잔치가 있을 때면 늘 초대받을 정도로 인근에서 음식 솜씨 좋기로 소문난 분이었다고 한다.
ⓒ 일러스트 김경래
3.
소호정 안동국시는 경상도 안동지방 반가 음식의 맥을 계승하고 있다. 육수는 한우 양지 부위만으로 내고 면은 밀가루에 콩가루를 섞는다. 면발은 노인도 쉽게 먹을 수 있도록 얇고 가늘게 썰지만 면 본래의 부드러움과 쫄깃함을 잘 유지하고 있다. 고소하고 깊은 맛의 칼국수에 파로 만든 양념, 잘게 다진 양지고기를 고명으로 올린다. 반세기 전만 해도 쇠고기를 육수와 고명으로 쓰는 국수를 맛보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웬만한 경제력의 대갓집 잔치나 제사가 아니면 엄두를 내기 어려운 일이었다.
소호정에서는 양념에 절인 깻잎 반찬도 유명하다. 칼국수와 부추김치가 찰떡궁합이란 것도 실은 안동국시가 세상에 알린 것이지만, 한 젓가락 말은 국수에 깻잎을 얹어서 먹는 맛의 조화는 아마 소호정이 처음이지 않을까?
소호정 임동열 회장의 회고
"어느 날 점심시간 후 어머니(김남숙)와 직원들이 밥을 먹는데, 늦은 점심을 하러 온 손님 가운데 한 분이 맛보기를 청해 깻잎을 드렸는데, 그분이 너무 맛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 뒤로 부추김치와 함께 깻잎절임을 반찬으로 내놓았는데 요즘 말로 대박이 났습니다."
노회찬도 소호정에 오면 국수를 깻잎에 싸서 먹는 방식을 좋아했다.
소호정 칼국수는 경상도 안동지방 국수를 안동국시라는 이름으로 대중화시킨 선구자 중 하나다. 국수라는 음식 자체가 귀했던 데다, 멸칫국물에 말거나 국수 삶은 물에 그대로 말아 먹던 게 국수인 줄 알던 사람들에게 쇠고기 육수와 쇠고기 고명을 얹은 국수가 나타난 것이다. 고급 국수로 업그레이드된 안동국시가 중산층이 형성되기 시작한 1980년대 서울 강남에서 탄생했다는 것은 그런 점에서 우연이 아니다. 그렇게 시작된 안동국시는 불과 몇십 년 만에 서울은 물론 대구를 비롯한 지방도시까지 퍼져나가 이제는 전 국민적인 전통 한식의 하나로 자리 잡고 있다.
소호정 창업자 김남숙은 전업주부였다. 학술원 회원을 지낸 저명한 경제학자였던 서울대 경제학과 임원택 교수(1922~2006)의 부인이다. 대구의 부유한 의사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다양하게 미각을 길렀던 분이다. 남편의 정년퇴직으로 생계를 걱정하게 된 김남숙이 남편 몰래 차린 식당이 압구정동 안동국시집이다. 이 작은 칼국숫집은 강남에 사는 경상도 출신의 성공한 중산층들 사이에 먼저 소문이 났고, 불과 몇 달 만에 줄을 서야 먹을 수 있는 집이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텔레비전에서나 보던 김영삼과 김종필 같은 실력자들까지 차를 대는 집이 되었다. 안동국시 소호정의 가장 유명한 '전설'은 단골손님이 대통령이 되어 첫 각료회의를 마치고 멤버들과 이 국수를 먹은 것이다. 이름하여 '청와대 칼국수'가 바로 소호정 안동국시였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김남숙 표' 칼국수의 가장 유명한 팬이었다.
소호정은 애초에 옥호가 그냥 '안동국시'였다가 나중에 '안동국시 소호정'으로 정해졌다. '소호정(笑豪亭)'은 호걸들이 껄껄 웃으며 찾아오는 집이란 뜻이다.
4.
소호정은 칼국수도 맛있지만 별도 메뉴 중 문어숙회가 별미다. 문어는 바다가 태백산맥으로 가로막혀 있는 경상도 안동지방에서는 제사상에 오를 정도로 귀한 음식이었다. 참문어를 삶아 초고추장에 찍어서 오이 등 야채와 곁들여 먹는 맛이 그만이다. 경상도식 음식점에 가면 으레 문어가 등장하는 것은 어쩌면 역사·지리적 문화가 낳은 전통이다.
문어숙회를 먹다가 오간 '아재 개그' 한 토막
"경상도에선 왜 문어가 제사상에 오르죠?"
"평소에는 못 먹는 음식이라서." 땡!
"노인들 체력 보강하라고." 땡!
"문어가 선비를 상징한대요. 문어 이름의 문이 글월 문(文), 다리가 많고 먹물을 뿌려대니, 자손이 번창하고 훌륭한 선비가 많이 나올 상." 딩동댕?
"진짜? 그럼 고등어는 머리가 고등해서 고등어인가요?"
"아! 그래서 안동에 고등어 자반이!"
기발한 발상과 재치에 참석한 여러 명이 뒤로 자빠졌다.
이런 재기는 노회찬이 전문이었다.
제대로 만든 전통 녹두전을 처음 맛본 젊은 직원이 그 바삭한 맛에 감탄하자, 노회찬이 공감의 표시로 건넨 말은 "그렇지? 크리스피하지?"였다.
노회찬에게 젊은 보좌진과 당직자들의 자리는 일종의 탈출구 같은 것이었다. 별별 정치적 의제와 고민에 쫓기고, 각종 공사석에서 늘 긴장된 일과를 보내야 하는 신세, 그나마 쉬는 시간도 대부분 혼자이기 일쑤인 정치인, 유명인의 운명. 그런 감옥 같은 생활 속에서 그가 허물없이 사람들과 자기 속도대로 술 마시고 이야기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시간이었다.
"의원님은 저희와 식사를 할 기회가 있으면 당신이 맛집을 직접 골라서 저희를 데려가요. 음식이 나오면 먼저 꼭 물어봐요. '어때 맛있지?' 하고. 그렇게 묻는 데 '아니'라고 할 수 있나요? '맛있어요.' 그러면, 그때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지금 먹는 음식의 기원, 조리법, 산지, 특징 등등… 생선 하나 가지고 한 시간은 보통이에요. '맛있지?'를 잘못 물었다가는 큰일 나요. 하하."
"그런 점에서는 노 의원도 별수 없는 '라떼'('나 때는 말이야'를 축약한 '나 때'와 커피 음료인 '라떼'와 발음이 비슷해 만들어진 표현)죠. 외로웠던 거예요."
정치인으로서 노회찬의 고독을 가장 가까이서 느끼는 사람은 비서실장.
"비서로서 제 역할은 소리꾼 곁에서 장단을 넣어주는 고수나 추임새 같은 거죠."
김종철과 같이 정치인의 생리를 잘 아는 비서가 기회를 봐서 운을 떼면, 그때부터 고독한 정치인의 무대가 열린다.
"생선 얘기가 왠지 바닥이 보인다 싶으면 바로 분위기를 바꿔줘야 해요. 아니! 그럼 그 고기가 알래스카에서도 잡힌다는 말씀?"
"그렇지, 알래스카!"
그렇게 이야기는 생선에서 다시 알래스카로 넘어가고. 젊은 당직자들은 몸을 비틀다 못해 차례로 화장실을 들락거리며 비서실장을 원망한다. (아씨, 실장님, 혼자만 충성하는 거예요? 벌써 두 시간째에요!)
아무튼 신이 난 노 의원이 또 한 말씀을 하신다.
"나 때는 말이야."
(이 대화는 7월 1일 여의도의 한 칼국숫집에서 노회찬을 추억하는 사람들끼리 개인적으로 나눈 것이다.)
국회의원 아니라 하느님의 할애비라도 모든 아재('아저씨'를 비꼰 표현)는 기본적으로 '라떼'다. 그러나 '라떼'는 다른 말로 '외롭다'는 말이다.
5.
"나는 토론에 관한 그의 지론을 기억합니다. '토론을 준비할 때, 어떤 말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강박을 가지면 그 토론은 실패다. 토론의 꽃은 상대의 주장을 논파할 때다. 지지자들이 원하는 것도 그것이다. 그런데 강박을 가지면 제때 제대로 논박을 하지 못한다. 자기가 말할 것을 생각하다가 타이밍을 놓치게 되는 것이다. 토론에서 이기려면 필요한 정보와 지식 빼고는 아무것도 미리 계획하지 마라.'"
"연설도 그렇게 할 때 노 의원다웠죠."
"노 의원이 대중연설이나 즉흥 연설의 귀재이지만 국회 단상의 연설처럼 어떤 틀에 갇힌 것은 잘 안 어울렸어요. 예를 들어, 부정부패 스캔들을 성토할 때 '여기 앉은 당신들, 노회찬과 299인의 도적들입니다!' 이걸 광화문에서 하면 명연설인데, 국회에서는 안 되잖아요."
"우리 국회가 서로 마주 보는 의석에서 양쪽 대표선수가 나와 논쟁하고 토론하는 영국 의회 같다면 단연 노회찬이 볼 만할 거예요. 우리 국회는 언제 그런 토론 문화를 가질 수 있을까요?"
노회찬 2주기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저는 느낌이 '2년밖에 안 됐어?'에요. 오래전 일 같은데…."
"전 벌써 2년인가 싶은 쪽입니다. 엊그제 일만 같아요…."
"시간이 더디 흐르든 빨리 흐르든 그 기억을 밀어내고 싶은 마음은 똑같을 겁니다…."
"그런 이중 감정을 가장 많이 공유하고 있는 게 50대인 것 같습니다. 재단 후원회원도 50대층이 가장 많고 40대 60대 순이고…."
"노 의원님 친구들 가운데 애인 관계 같은 분들이 있어요. 아마도 그분들은 노회찬을 자랑스러워했기에 그렇게 보일 거라고 생각해요. 자기들이 생각만 하고 행동으로는 미치지 못하는 곳, 자기의 삶이 가닿고 싶은 곳에 먼저 가 깃발을 들고 있는 친구. 그런 친구가 자랑스러웠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맨 앞에서 최루탄 마시며 돌 던지는 사람, 맨 뒤에서 따라오는 사람, 길 위 빌딩 창문에서 물과 수건을 던져준 사람, 손 흔들며 손뼉 쳐 준 사람. 모두 같은 기억을 공유하고 있죠. 어디에 있었든 그 모두의 마음을 두루 잘 헤아릴 줄 아는 진보가 되어야 할 것 같아요. 노회찬재단이든, 정의당이든…."
"저도 그런 두 감정 사이에 있는 것 같습니다. 10년 뒤 지금의 십대들이 무엇으로 어떻게 노회찬을 기억할까 생각해봅니다. 재단 실무자로서 큰 책임감을 느낍니다."
어느덧 소호정의 '칼국수 타임'이 끝나갈 무렵 누군가 노회찬을 추억하며 말했다.
"제가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는데요, 노 의원님이 클래식 마니아로 지식이 풍부하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몇 번이나 '저도 클래식 좋아합니다'라고 말씀드리고 음악 이야기를 나눴으면 했는데, 하지 못했습니다. 그분이 떠난 뒤 저는 왠지 그게 많이 아쉽고 죄송했습니다. 왜 그 쉬운 걸 못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