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회찬재단 - 평등하고 공정한 나라

- 이인우(한겨레 기자)


1.
'음식천국 노회찬' 열세 번째 식당은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지방법원 부근의 한정식집 '호정(湖亭·마포대로14길 12-19)'이다. 골목 안쪽에 숨은 듯이 있어서 눈에 잘 안 띄지만, 1997년 문을 연 뒤 20여 년 동안 정관계·금융계 인사들의 사랑방 역할을 해온 집이다. 정갈하고 신선한 음식으로 단골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고 있어 이른 예약 없이는 자리를 구하기 어렵다.

노회찬은 2012년부터 호정에 나타났다. 정의당 원내대표를 맡고 있던 20대 국회 때는 자주 왔다고 한다. 이따금 주인장은 "예약 손님 중 의원님과 마주쳐서는 좀 서로 곤란한 분이 계시다"며 근처에 있는 별관으로 노회찬을 안내하기도 했다. 노회찬에 대한 배려였다. 이 집의 전통적인 고객들이 노동운동가 출신의 진보정치인과는 잘 매치가 안 되는 탓에 노회찬의 선택을 뜻밖으로 여길 사람도 있을 것 같다. 짐작건대, 노회찬이 정의당 원내대표로 당시 민주평화당과 원내교섭단체(20석) 구성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두 당의 회합 장소의 하나로 호정을 고른 게 아닌가 싶다. 사정이야 어떻든, 호정의 음식은 금세 노회찬의 미각과 통했을 것이다. 노회찬은 맛집을 발견하면 집안의 '어른'처럼 보좌진들을 데리고 가 자랑하듯이 맛 경험을 시켜주곤 했다.

주인은 노회찬을 "신사"로 기억하고 있었다.

"음식 맛이 정겹고 깔끔하다고 칭찬해 주셨는데, 얼마 뒤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다."



ⓒ일러스트 김경래


호정을 다시 찾은 것은 노회찬재단이 모처럼 회동하는 고문단 어른들의 점식 식사를 위해서. 재단 사무실에서 이동하기 쉬운 곳인데다, 연령대가 높은 분들에게 대접하기 좋은 음식이기에 재단 쪽에서 고른 듯했다.|

7월 중순 노회찬 2주기 추모행사를 앞두고 한자리에 모인 고문단은 대부분 노회찬과 민주노동당(2000~2008) 시절을 함께 한 동지들이다. 요즘에는 웬만히 큰 행사나 집회가 아니면 한자리에서 보기 쉽지 않은 분들이다. 노회찬재단 고문단은 권영길(79·전 민노당 의원), 천영세(77·전 민노당 의원), 김혜경(75·빈민운동가) 등 민노당 대표를 지낸 원로를 비롯해 박순희(73·천주교정의구현 전국연합 지도위원), 단병호(71·전 민노당 의원, 민주노총 위원장), 이수호(71·전 민주노총 위원장, 현 전태일재단 이사장), 최순영(67·전 민노당 의원) 등 '동지'들과 정의당의 심상정 대표, 이정미 전 대표 등 22인으로 구성돼 있다.

서로서로 동지이자 지인들이기도 한 이들은 허물없는 분위기에서 좋은 음식을 나누며 사전 시나리오도 없는 대화를 나누었다. 때론 즐겁고, 때론 무겁게. 재단에서 선물한 "멋쟁이 진보"를 상징하는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기념 촬영도 했다.

기자는 가능한 한 기록만 했다. 이하, 호정의 정담(情談) 또는 정담(政談).


2.
우선 기록으로 남겨둔다는 의미에서 노회찬과의 첫 만남을 떠올려보기로 한다. "당에서 먼 순서로 몇 분이 얘기하지." 천영세 전 의원이 가닥을 잡아주었다.

먼저 단병호 의원 이야기

"1990년 서울구치소에서 처음 만났다. 노태우 정권이 재야운동단체를 일제히 털 때였다. 나는 전노협(전국노동조협의회·민주노총 전신)으로, 노회찬 동지는 인민노련(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 주도자로 들어왔다. 나를 찾아와 인사를 하길래 같은 수의 차림이어서인지 연배가 비슷한 줄 알았다. 나도 연식이 좀 들어 보이지만.(웃음) 그렇게 인연을 맺었고 출소 뒤에도 노회찬이 <매일노동뉴스>를 운영하면서 더 자주 만나게 되었다."

단병호가 노회찬에게 마음의 빚을 졌다고 생각한 일은 2004년 총선 민노당 비례대표 후보를 정할 때였다. 성향이나 당내 지지기반이 비슷해 흔한 말로 ‘쫑이 나는' 상황이었다.

"비례대표 후보 선출을 앞두고 노 동지가 찾아와 출마 의사를 묻길래, '나도 결정된 바 없다'고 했더니 '선배가 나가시면 전 안 나가겠습니다' 그래요. 서로 양보해야 할 수도 있는 상황이라 내 의사를 먼저 알아보려고 했던 것 같아. 그래서 내가 '그러지 말고 당신도 꼭 나와라. 같이 협력해서 하면 둘이 다 될 수도 있지 않느냐'고 했다."
(결국 정파 간, 또는 정파 내 줄다리기 끝에 같은 피디(PD)계열에서는 단병호가 안정권인 2번이 되고, 노회찬은 당선권 밖인 8번을 받았다.)

"개표 날 정말 마음이 조마조마했어요. 말은 안 했지만, 노회찬이 떨어지면 평생 죄가 될 것 같았어. 나보다는 노회찬 같은 사람이 국회에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이 진작부터 있어서, 내가 길을 가로막은 게 아닌가 하는 마음에 개표 내내 엄청 마음이 불편하고 괴로웠어요. 그런데 다행히 노회찬이 되어서 마음의 큰 짐을 덜 수 있었습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 지도위원 박순희는 노회찬의 부인 김지선이 천주교 영세를 받을 때 대모를 섰다. (노회찬의 어머니는 집안이 화합하려면 종교가 같아야 한다며 노회찬의 부친과 누나, 두 며느리를 가톨릭 세례를 받을 것을 권했다.) 그래서 그는 노회찬을 "영적인 사위"로 여겼다.

"지선 씨와 나는 1970년대부터 노동운동을 같이한 사이에요. 정의구현사제단이 정의구현전국연합의 요청으로 사회운동가들에게 가톨릭 영세를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준 적이 있는데 그때 그분들이 혜화동 성당에서 영세식을 했습니다."

박순희는 그날 아내의 영세식에 참석한 노회찬에게도 종교를 가져볼 것을 권했다. '강요하는 건 아니지만 종교가 때로는 버팀목이 되어줄 때가 있다'고. 노회찬은 박순희가 떼쓰듯 언제 (영세) 할 거냐고 다그치자, "시간이 나면 공부하겠습니다"라고 답하는 것으로 상황을 모면했던 것 같다. 결국 노회찬은 시간을 내지 않은 건지, 못 낸 건지 종교적 신앙을 갖지 않고 아내 곁을 떠났다.

"아마 하늘나라에서는 열심히 공부하고 있지 않을까요? 그래야 나중에 지선 씨를 만나지. 아니, 어쩌면 지선 씨한테 혼날까 봐 이미 받아놨는지 몰라."

김혜경은 1997년 국민승리21 여성위원장을 맡았을 때 정책기획위원장이던 노회찬을 처음 만났다. 당시 여성위원회 부위원장이 노회찬의 부인 김지선이었다. 김지선과는 1982년 난곡에서 처음 만났다.

"지선이는 인천 산선(산업선교회)에서, 나는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고(故) 김동완 목사(한국교회협의회 총무)가 난곡협동조합을 지원해 달라고 해서 갔더니 단발머리 아가씨가 실무자로 나와요. 그러다가 국민승리21에서 다시 만났는데 두 사람이 부부인 줄은 그때까지 까맣게 몰랐어요. 2000년 남한 사회단체들이 북한 조선노동당 창당 55주년 행사에 초청받아 평양에 가게 되었을 때 공항으로 노회찬 배웅을 나온 걸 보고서야 알았습니다. 그 덕분에 노회찬과 가까워져서 형님, 아우님 하며 지냈죠."





교사운동(전교조)을 하다가 노동운동에 합류한 이수호 이사장의 이야기.

"나는 노동운동을 늦게 시작했다. 그것도 처음엔 교육운동이었는데, 당시에는 전교협(전국교사협의회·전교조의 전신) 안에서도 교사가 무슨 노동자냐는 반발이 많았다. 노동운동에 참여하면서 나는 정말 많은 노동운동가들에게 감탄했다. 어떻게 대학을 포기하고 공장으로, 감옥으로 갈 수 있는지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나이는 나보다 적어도 그런 치열한 분들에 대한 존경 같은 마음을 품고 있었는데, 그중 한 분이 노회찬 동지였다."

"저도 단병호 위원장님처럼 노회찬 동지에게 마음의 빚을 졌다. 어쩌다 민노총 위원장을 맡고 있었는데, 선거 앞두고 출마하실 분들이 제게 전화를 하며 부탁 같은 것을 할 때였다. 노회찬 동지에게도 전화가 왔다. 출마 소식을 전하면서 민노총이 당의 대의를 위해 조합원들이 정파 투표만은 하지 않도록 해달라는 당부였다. 나 역시 당연히 같은 생각이었기에 아무렴, 걱정하지 말라고, 민노총 차원에서 뭘 결정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안심시키는 말을 해준 기억이 있다. 그러나 상황은 그렇게 전개되지 못했고, 선거 결과도 당선권 밖인 8번으로 나와 무척 미안했다."

"내가 남에게 쉽게 곁을 주는 성격이 못되다 보니, 노회찬 동지와도 개인적으로 가깝게 지내지는 못했다. 그러나 공식·비공식 자리에서 관찰해 보면 노회찬 동지는 뭐랄까 '스마트하다. 신사 구나' 하는 느낌이었다. 자주는 아니었지만 그와 이야기를 나누어 보면 왠지 '이 사람은 나를 이해하고 있구나. 나를 존중해주는 사람이구나' 하는 느낌을 받곤 했다."


3.
"노회찬과 음식에 관해 연재를 한다고 하니까 생각나는 건데, 그때도 강화도 황복은 노 의원이 바람을 잡았어."

칠순의 노(老)운동가들이 간단한 회고에 이어 이제는 기억 속에만 남은 옛 민노당 시절을 추억한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며 천영세 전 의원이 꺼낸 비화. 민노당 국회의원 10명(보좌진을 포함하면 수십 명이었지만)의 점심 회식비로 무려 370만 원을 지출한 '호화판' 회식 사건의 전말.

2007년 여름 '원내 투쟁'이라고 부른 의회 일정을 마치고 2주간 국회가 여름방학에 들어갈 때였다. 보수 여야당 의원들은 대부분 외유나 가족 여행으로 휴가를 보내지만, 민노당 의원들은 사정이 달랐다. 휴가라고 해도 국회를 벗어나면 다시 당원으로 돌아가 전국의 파업 현장으로, 농민들의 농성장으로 지원 활동을 나가던 때였다. '원내 투쟁'에 심신이 지친 상태에서 장외 활동을 하려고 생각하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때 들고 일어났지. 야, 좀 쉬게 해주면서 부려 먹어라. 사장(당대표) 나와!"

그렇게 해서 "짧게라도 서울 밖으로 나가 콧바람이라도 쐬고 오자"는 쪽으로 중의가 모였는데, 뭘 먹으며 놀아야 할지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 노회찬이 동료 의원실에 제안한 곳이 강화도 황복집이었다. 황복이 뭔지도 모르는 의원이 수두룩했다.

"우리는 그냥 복매운탕에 소주 한잔하는 걸로 알았는데, 복어회가 나오더라고."

"복중에 최고로 친다는 황복인데 다들 처음 먹어봤지."

"그런데 노 의원은 거길 어떻게 알았지? 확실히 미식가가 맞긴 맞았나 보네."

"이 자리에 없다고 너무 덮어씌우지는 맙시다."




노동자들의 당이라고 하는 민노당 의원들이 어떻게 그렇게 호화판 회식을 할 수 있느냐고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을 것 같다.

2004년부터 2008년까지 17대 국회에 들어온 민주노동당 국회의원은 10명. 권영길, 조승수 두 지역구 의원과 심상정, 단병호, 이영순, 천영세, 최순영, 강기갑, 현애자 그리고 노회찬까지 8명 비례대표 의원들의 한 달 월급은 180만 원(임기 마지막 1년은 50만 원이 올라서 230만 원)이었다. 당시 국회의원 월급은 약 840만 원. 그러나 민노당에서 소속 의원들의 세비는 모두 당 공동의 재원으로 간주되었다. 보좌진도 마찬가지다. 국회의원 1인에게 붙은 6명의 보좌진(4급~9급 공무원에 준한다) 월급은 4급 보좌관 490만 원에서부터 9급 비서 180만 원까지였다. 민노당 국회의원 봉급 180만 원은 9급 공무원에 준해 책정된 것이다. "뭘 좀 멕여가면서 부려 먹어라"는 푸념은 엄살만이 아니었다.

아무튼 이날 난데없는 황복 회식비 370만 원 폭탄을 맞은 것은 천영세 의원실. 의원들의 단체 회식비가 따로 있었던 것도 아니어서 결국 원내대표인 천 의원실에서 카드를 긁었던 것.

"회식을 마치고 나오는 보좌진들의 표정이 밝지 않아서 보좌관에게 누가 싸웠느냐고 물으니 그래요. '모처럼 좋은 복요리도 드시고 기분도 좋으신 날이니 더 묻지 마세요'."

모시는 의원이야 원내사령탑으로서 거금 한 번 폼 나게 '쏜' 것이 됐지만, 의원실 보좌진들은 아끼고 아껴둔 '복지비'가 한 번에 날아간 것이었다.

민노당 국회의원 봉급 이야기가 나오자 또 한 사람의 "맺힌 한"이 제풀에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두 차례 지급됐던 민주화운동보상금(지원금) 못 받은 노동운동가 단병호 식구네 이야기.

"2004년 국회의원이 되고 집사람한테 미안한 게 있었다. 노동운동한다고 한참 고생시켰는데 보상금(또는 생계지원금)을 한 번도 못 받아줬다. DJ 시절에 민주화운동보상법이 만들어졌을 때 민노총 위원장을 하고 있었는데, DJ 정부 출범 후 노동운동 관련자들이 보상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민주화 이후 사건이라는 거지. 그거 따지느라 싸우는 판에 위원장이 보상 신청을 할 수 있겠나. 그래서 그냥 지나갔고, 나중에 노무현 정부 때 민주화운동 유공자 생계지원법이 생겼어. 연 수입 3500만 원 이하를 대상으로. 그런데 마침 억대 연봉의 국회의원이 되었잖아. 자격상실. (사실 한 달에 180만 원 받는 노동자인데) 1년쯤 지나서 집안 어딘가 굴러다니던 지급통지서를 집사람이 발견하고 잠깐 좋아라 했었지…."


4.
회식 이야기가 돌고 돌아 노회찬의 술 실력 이야기에 이르자, 화살이 권영길 전 의원에게로 돌아간다. 민주노동당에서 큰 술통으로 권영길을 빼놓을 수 없었다는데, 정작 두 사람의 술 실력을 가늠해볼 전설은 전해지지 않고 있었기에. 대표 술꾼 권영길과 또 한 명의 대표 술꾼 노회찬이 술로 일합을 겨루어 노선이든 인물이든 결정을 한다? 웃자고 하는 소리지만 구경하는 재미는 있을 것도 같다.

천영세 "노회찬은 생전에 당에서 자기가 술이 제일 세다고 생각했다. 권 대표께서는 이런 주장에 조금 불만이 있을 것 같다."

권영길 "우리 둘이 술로 붙어본 적이 없어요."

사람들 "그럼 누가 센지 알 수가 없는 거네."

권영길 "나는 노회찬 동지가 술을 잘 마시는 사람이란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어요."

사람들 "아닌데, 무척 좋아했는데요."

권영길 "나는 노회찬이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란 기억도 없어요."

술을 좋아하고 잘 마신다는 소문조차 들어본 바 없는 사람과 나를 같은 저울에 달지 말라. 아무래도 그런 전략이시다.

사람들, 수군 수근 "아무래도 노회찬 본인이 있어야 되겠는 걸…."

천영세 "노회찬과 대작한 얘기로는 그럼 나밖에 없는 건가?"

천영세와 노회찬은 2016년 총선을 앞두고 반포 고속버스터미널 옥상 삼겹살타운에서 저녁 6시부터 새벽 2시까지 장장 8시간 합을 겨룬 적이 있다고 한다. 결과는 무승부. 둘 다 맨정신으로 택시 타고 잘 헤어졌다나? 2차를 누가 먼저 가자고 했느냐는 추궁에 천 전 의원은 "기억에 없다"고 한다.

"8시간 동안 2차밖에 안 했어. 1차로 삼겹살에 소주, 2차로 호프. 주제는 총선에서 노회찬이 창원으로 가느냐, 노원으로 가느냐. 나는 노원으로 가라고 했고, 노회찬은 창원에서 잡아당기고 있어서 고민이다, 대충 그런 이야기. 결국 창원으로 낙착되었지만."

다시 권영길.

"노회찬이 권영길과 술 실력을 비교당하면 좀 억울할 것 같기는 해. 술자리에서는 늘 내가 유리한 위치이니까. 좋은 일이든 골치 아픈 일이든 권영길은 상좌에 앉아서 호쾌하게 마시기만 하면 되는데, 노회찬은 뒷일까지 신경 써야 하잖아? 그러다 보면 아무래도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기 어렵겠지."

"그런데 이 기자, 노회찬이 정말 미식가가 맞기는 해요? 보시기에?"

"네, 맞습니다. 맛을 알고 좋은 맛집을 찾아다니는 걸 즐기는 탐식가(探食家)입니다."(기자가 한 말은 노회찬이 모험을 즐기는 탐험가처럼 음식을 탐험한다는 말이었는데, 탐할 탐(貪)의 탐식으로 들었을 수도 있다.)

"아무튼 노 의원이 미식가였다니 하는 말인데, 소주 마시는 사람과는 소주를 마시면서, 포도주 마시는 사람과는 포도주 잔을 부딪치면서, 김치찌개 먹을 때는 김치찌개 먹으면서, 칼질해야 할 때는 칼질을 하면서 진보정치를 이야기한 사람이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사실 진보라고 언제까지 삼겹살에 소주만 먹는 운동이어야 하는가. 근본주의가 아니라 유연한 진보의 미래를 지향해야 하지 않나'라는 이야기를 노회찬은 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지금 진보정치를 말하는 사람들, 정당 활동하는 사람들에게 노회찬의 참뜻이 잘 전달되었으면 좋겠습니다."






5.
이날 노회찬재단 쪽은 고문단에게 대구 지지자가 보낸 선글라스를 하나씩 선물했다. 노회찬재단이 추구하는 멋진 진보, 세련된 진보, 친숙한 진보를 상징하는 의미에서 준비했다고 한다. 정의당 이정미 전 대표와 심상정 현 대표도 선글라스를 썼다. 누군가 농담조로 한마디 한다.

"노회찬재단과 정의당이 선물을 주고받는 걸 보니 아주 한통속은 아니구먼."

"한통속이면 또 어때. 일반 사람은 정의당과 노회찬재단이 같은 줄 알아."

김형탁 사무총장이 짐짓 걱정 비슷한 걸 한다.

"정의당이 잘 돼서 재단 후원회에 가입한다는 사람이 많으면 좋겠는데, 요즘은…."(박원순 전 시장의 죽음을 둘러싼 정의당 입장에 대한 비난과 불만이 비등할 때였다.)

"당장은 아니겠지만, 장차 진보정당과 노회찬재단과의 관계 설정을 고민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독일의 사회당과 에버트재단, 기민당과 아데나워재단처럼…."

정의당 분들이 자리를 뜬 뒤 몇 분들이 조심스레 정의당 걱정을 했다.

"당에 젊은 피가 들어와 새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새로운 어젠다를 제기하는 측면은 긍정적인데, 최근 젊은 의원들의 행동이나 발언은 우려스러운 점이 있다. 진보정치, 진보정당은 지난 수십 년의 역사와 수많은 사람의 희생 위에 이룩된 것인데, 이런 역사와 희생이 부정되거나 무시되는 느낌을 주어서는 안 된다. (젊은 의원들이) 진보정치운동의 성과로 그 자리에 갔다면, 그 자리를 좀 더 무겁게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소신을 이야기할 수는 있는데, 장례 기간 중에 조문을 하지 않겠다는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우리나라 사람들 정서에도 맞지 않고, 본인의 뜻도 잘 안 드러나면서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당에도 어려움을 안겨준 것이다. 아직 진상이 다 밝혀진 것도 아닌데 그런 강한 발언을 하는 것은 성숙하지 못한 행동이었다."

"요즘 진보진영 젊은이들조차 우리나라 진보정치의 역사나 토대가 어떻게 이뤄졌는지 제대로 모른다. 알려고도 안 하고 당장의 현안만 좇는 것 같아 안타깝다. 꼰대 소리를 듣는 한이 있어도 이런 현실에 대해 어른 입장에서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젊은이들에겐 또 그들의 시대적 과제가 있으니 너무 우리 생각만 할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시대에 따라 진보적 의제를 어떻게 볼 거냐 하는 시각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걸 무시할 수 없고, 무시해서는 대화 자체가 안 될 수 있습니다. 이 문제는 그리 단순하게 접근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진보 의제는 당연히 다를 수 있지요.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런 의제의 차이가 아니라 일을 풀어가는 과정입니다. 윗대 사람들이 참고 걱정하고 따라주는 것만큼, 젊은 세대들도 그런 마음을 가지고 선배 세대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요…."

"여기 재단 관계자도 있으니 한마디 하면, 이번 (박원순 시장) 사건을 보고 절실히 느끼는 건데 진보정치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나 교육이 꼭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진보운동에서 정당정치라는 것이 무엇인가요? 혁명이 아니라 선거를 통해서 국가권력을 잡자는 거잖아요. 그런 목적을 공유하는 당이라면 개별 당원, 의원이 어떻게 행동하고 대중들과 만나야 할까요? 선거를 통해 권력에 다가가려면 사안마다 즉자적 대응만 할 게 아니라 장기적인 비전과 행동강령을 공유하고 있어야 대중의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안타깝습니다."


6.
노회찬은 호정의 녹두빈대떡을 좋아했다고 한다. 이 집은 빈대떡을 녹두와 숙주나물만 가지고 빚는다. 덕산막걸리 한 잔에 고소한 녹두빈대떡 한 조각의 앙상블이 그만이다. 마지막으로 나오는 칼국수는 어디 내놔도 명품으로 손색이 없다.

참석자들은 모두 호정이 처음이라고 한다. 노회찬이 정의당 원내대표 시절 주로 온 집이라고 하자, "우리하곤 안 오고 누구하고 온 거야?"라며 시샘하듯 묻고는 "그 사람 이런 집을 좋아했지. 어딜 가도 정감 있는 집을 골랐어".

"오늘 여기 올 때는 사실 약간 불편한 마음도 있었다. 우리가 다 7학년 이상인데, 비까지 오는데 굳이 이렇게 걸어서 먼 식당을 잡았을까 ? 싶었다. 그런데 막상 와서 음식을 먹고 보니 '내가 이 식당으로부터 존중을 받는다'는 느낌을 주었다. 음식들이 한결같이 노회찬 동지의 마음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좋은 식당에 초대해 줘서 고맙다."



▲ 한정식 '호정' 주인 박귀임 씨. ⓒ노회찬재단


호정의 주인 박귀임(61) 씨는 전주 태생으로 어려서부터 전북 고창의 삼양사 사택에서 성장하고 결혼 생활도 했다고 한다. 부모님과 남편은 물론 50여 가구에 이른 다양한 사택 구성원들이 벌이는 생일, 승진, 회갑 등 각종 잔치에서 음식을 배웠다. 서울에 올라와 찻집을 하다가 시간이 비어 어느 유명 한식당 주방을 1년쯤 책임지다시피하면서 지금의 주요 손님들과 인연을 맺었다. 한 단골손님이 "왜 이런 좋은 솜씨를 가지고 자기 식당을 하지 않느냐"는 말에 호정을 차리게 되었다고 한다. 호정이 단골의 사랑을 받게 된 것은 신선로니 구절판이니 하는 판박이 음식을 사절하고, 집에서 먹는 정갈한 음식을 추구한 것.

"생각해보니 어렸을 때 내가 제일 싫어한 음식(뒤집어 말하면 나이 들어야 맛을 아는 음식)에 비밀이 있었다. 그걸 연구해서 내놓으니 비로소 손님들이 '이 맛이야'라고 했다."

박 씨는 지금도 주방에서 밑반찬부터 주요 요리를 모두 직접 한다. 음식을 미리 해두거나 묵히지 않고 예약 시간에 맞춰 바로 만든다

박 씨는 성공비결로 단골손님들의 한결같은 사랑을 꼽는다. 시간이나 주머니 사정이 여유 있는 계층들이 애용하다 보니 높은 가격대임에도 호정은 불경기를 모른다. 성공비결을 캐기보다는 이 집의 단골 명단을 살펴보는 게 빠를 것 같아 몇 분 거명을 청했다. 김황식, 이낙연, 이현재, 윤증현, 이계안 등등. 대부분이 정관계, 경제계 인사들이다. 어떤 모임으로부터는 현금 500만 원이 든 봉투와 함께 "앞으로도 잘 부탁드린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음식으로 '귀인'을 대접한 결과는 어땠을까. 박 씨는 남편 없이 삼남매 시집장가를 보내면서 아파트를 한 채씩 사주었다. 호정 근처에 건물을 짓고 중간 가격대의 식당을 따로 내 큰 아들에게 맡겼다. 비싼 가격 때문에 호정의 음식을 즐기기 어려운 손님들을 위해 매출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고 운영 중이라고 한다. 식재료를 직접 조달하는 농장이 경기도 양수리와 강원도 홍천 두 곳에 있다. 4인용 테이블 9개를 운영해 이런 성공스토리를 썼다.

노회찬이 있었다면 한마디 하지 않았을까? '정치가 따로 있나? 정직하고 근면한 사람이 성공해서 자기 가족을 건사하고 이웃에게 베풀고, 그러고도 여력이 있으면 공동체의 미래를 위해 투자하는 것, 그것이 정치가 아닌가'라고.

덧붙임.

노회찬 2주기 추모제가 7월 18일 마석 모란공원 묘지에서 있었다. 추모식에서 노회찬은 여러 형태로 호출되었다. 부인 김지선 여사는 "나는 노회찬을 추모하는 이런 자리에 오는 게 솔직히 싫다"고 했다. "2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노회찬의 부재를 받아들일 수 없는" 그 참담한 마음을 누가 모르랴. 권영길은 추도사에서 노회찬의 이름을 세 번씩 모두 아홉 번을 외쳤다. 하늘을 향해, 땅을 향해, 사람들을 향해 "노회찬! 노회찬! 노회찬!".

추모제의 마지막은 노회찬이 생전에 좋아했던 노래 <그날이 오면>을 제창하는 것이었다. 작렬하는 태양 아래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사람들의 헌화가 길게 이어지는 동안 노래도 마음에서 마음으로 오래 이어졌다. 이날의 노래,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모든 이에게 흘러가 닿기를….

한밤의 꿈은 아니리 /오랜 고통 다한 후에 / 내형제 빛나는 두 눈에 / 뜨거운 눈물들
한줄기 강으로 흘러 / 고된 땀방울 함께 흘러 / 드넓은 평화의 바다에 / 정의의 물결 넘치는 꿈
그날이 오면 / 그날이 오면 / 내형제 그리운 얼굴들 / 그 아픈 추억도 / 아, 짧았던 내 젊음도 / 헛된 꿈이 아니었으리 / 그날이 오면 /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 그날이 오면 / 내형제 그리운 얼굴들 / 그 아픈 추억도 / 아, 피맺힌 그 기다림도 / 헛된 꿈이 아니었으리 / 그날이 오면 / 그날이 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