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회찬재단 - 평등하고 공정한 나라


재단 소식

민들레(18호) ‘노회찬법’이 만들어지기까지

재단활동 2020. 10. 29




후원회원 이야기

‘노회찬법’이 만들어지기 까지



노회찬 의원은 나보다 한 살 많긴 하지만 같은 76학번이라는 동년배이고, 박정희 유신·긴급조치 시대부터 동시대에 민주화운동을 했으며, 17대 초선으로 국회에 입성한 것도 같다. 임채정 의원이 물러나신 자리에 와서 국회의원을 했으니, 노원을, 노원병이라는 같은 동네에서 나란히 국회의원을 하며 무척 가까이 지낼 수 있었던 관계였다. 

그전까지는 그와 한 번도 같이 일을 해본 적이 없었다. 노원병에 노회찬 의원이 왔을 때도 아주 가까운 후배인 김성환 의원과 경쟁하는 관계이니만큼, 지역에서 가까이할 수는 없었다. 물론 노 의원은 나를 잘 몰랐을 수 있지만, 나는 그를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당시 이미 탤런트 못지않은 대중적 인기가 있지 않았는가. 노 의원이 우리 동네에 처음 왔을 때도 그의 인기가 대단해서 각종 지역의 행사장에서 나보다 훨씬 박수소리가 컸다. 노원에서는 내가 터줏대감인데…… 새로 온 노 의원의 인기에 시기심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 특유의 달변과 위트를 마주하니 시기는 사라지고 참 좋은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만들었다. 

노원에 처음 와서 어느 행사장이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자신을 소개하며 “아버지의 성씨는 노씨이고, 어머니의 성씨는 원씨입니다. 그래서 저는 노원의 아들입니다!”라고 익살스럽게 말하는 것을 보며 금방 사귀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 또한 나를 만날 때마다 내가 하고 있던 을지로위원회를 칭찬했고, ‘우 의원을 신뢰하고 존경한다’며 높이 치켜세워주었다. 그와의 좋은 인연은 내가 원내대표를 지낼 때도 이어졌다. 문재인 정부로 정권교체 되고 첫해 국회는 여소야대로 개혁을 추진하기 쉽지 않았다. 여야 교섭단체 1대2 구도 속에서 사사건건 발목잡기가 이어졌다. 그러던 노회찬 의원이 민평당·정의당 공동교섭단체의 대표로 선출되어 함께 협상장에 앉게 되었으니 내 마음이 얼마나 든든했겠는가! 문재인 정부 가장 중요한 첫해 개혁 추진에 노회찬 대표 도움을 참 많이도 받았다. 

극심한 정치갈등과 협상 주제였던 드루킹 국정조사 협상과정에서 노 의원과 한편이 되어 자유한국당·바른미래당과 치열한 논쟁을 했다. 나중에 생각해보면 자신과 닿아있었던 문제이기 때문에 본인에게 예민할 수 있었는데도, 그 많은 협상과정에서 늘 침착하고 차분하게, 그렇지만 분명하고 선이 굵게 협상에 임하는 모습을 보며 많은 배움을 얻었다.

내가 원내대표 임기가 끝나고 노 의원 주도로 장병완 의원과 셋이 내 위로 겸 수고를 치하하는 술자리가 만들어졌다. 그때는 드루킹 의혹으로 노회찬 의원도 곤혹스러운 상황에 처해 있을 때였다. 그날 노 의원은 술을 꽤나 마셨다. 평소에 술을 잘 마시는 사람이라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는데, 뜬금없이 “내가 더 나이가 들면 우 의원 팬이 될 것 같소!”라며 날 칭찬했다. 그 말과 달리 그의 얼굴을 보니 유난히 더 쓸쓸하고 슬퍼 보였다. 

결국 그는 미국에서 돌아오자마자 다른 길을 택하고 말았다. 숱한 비리에 감옥 살고 나와도 또 정치하겠다고 달려드는 사람들이 천지인 세상에서, 노 의원은 한 점의 티도 견디지 못하는 결백 그 자체인 사람이었던 것이다. 저렇게 순결하고 깨끗한 사람이, 이렇게 한 점의 티 때문에 다른 길을 택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세상이 참으로 원망스러웠다.

며칠 고민 끝에 노 의원의 명예를 기릴 방법을 고민했다. 생각 끝에 그의 이름을 붙인 법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고, 그를 죽음으로 내몬 잘못된 제도를 고치는 법을 내게 된 것이다. 정당법, 정치자금법을 개정해 원외위원장이라도 떳떳하게 정치자금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노회찬법’이 그것이다. 

그렇게 ‘노회찬’을 내 의정활동의 일부로 삼고 오래도록 잊지 않고 그의 정신을 받들기 위해 더 치열하게 살 것이다. 


- 우원식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서울 노원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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