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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21호) 후원회원 이야기 - 길을 걷다가도 문득 가슴이 미어진다

재단활동 2021. 01. 28


 

후원회원 이야기

길을 걷다가도 문득 가슴이 미어진다

 

나는 감히 선택하지 못한 길

우리나라 노동법은 1953년 한국전쟁을 치르는 와중에 부산에 피난 가 있는 국회에서 제정됐다. 노동법에 대해 축적된 지식과 경험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이북에 노동법 체계가 갖춰지는 것에 대항하기 위해 남북 체제 경쟁 수단으로 외국 노동 법제를 모방해 졸속으로 제정됐다는 것이 기존 학계의 정설이다. 이에 대해, 이승만 장기집권 획책을 위한 ‘발췌개헌’ 등 헌법 유린에 저항하는 차원에서 진행된 활발한 의회 활동과 ‘조선방직 쟁의’ 등을 대변한 노동운동 출신 정치인 등이 입법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이룩한 성과를 과소평가했다는 주장도 있다.

어떤 입장이든지 간에 당시 제정된 우리나라 최초 노동법이 현행 노동법보다 더 좋은 내용을 갖추고 있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60년대 이후 군사정부를 거치는 과정에서 노동조합의 정치활동이나 공무원·교사의 단결권을 제한하는 방향으로 점차 개악돼 현행법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한 예로, 현행 노동조합법 제 2조(정의) 제 4항에서는 ‘노동조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노동조합’이라 함은 근로자가 주체가 되어 자주적으로 단결하여 근로조건의 유지·개선 기타 근로자의 경제적·사회적 지위의 향상을 도모함을 목적으로 조직하는 단체 또는 그 연합단체를 말한다.” 최초 제정된 노동법에서는 이 조항의 “경제적·사회적” 뒤에 단어 하나가 더 있었다. 무엇이었을까? 바로 ‘정치적’이라는 단어이다.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 삭제된 뒤 아직까지 복원되지 않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는 노동조합의 정치활동을 매우 불순하게 바라보는 경향이 있지만 본래 노동운동의 가장 중요한 영역 중 하나가 정치활동이다. 최저임금 제도, 노동시간, 비정규직 관련 법규 등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논란만 봐도 노동운동의 정치 역량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 수 있다. 노사정이 모여 머리를 맞대고 해법을 논의해 법제화하는 일도 어차피 최종적으로 국회 등 정치 영역에서 결정될 수밖에 없다. 현장에서 조합원 수를 한 명이라도 늘리기 위해 피땀 흘리는 고전적 조직활동도 결국 노동조합의 정치적 교섭력을 높이기 위한 노력과 무관하지 않다.

유럽 초등학교 철학 교과서에서는 ‘양질 전환의 법칙’이 현실에서 이루어진 대표적인 예로 ‘노동운동의 정치세력화’를 들기도 한다. 노동조합과 노동조합원 수가 점차 늘어나는 ‘양적 변화’를 계속하다가 일정한 역량을 갖추게 되면 정치세력화하면서 노동운동 중심의 진보 정당이 탄생하고, 그 정당이 집권을 하게 되면 사회제도를 바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질적 변화’가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유럽 등 선진국에서 지금 집권하고 있거나 과거 집권했던 정당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잠깐 생각해보자. 영국 ‘노동당’, 프랑스 ‘사회당’, 독일 ‘사민당’, 스웨덴 ‘사민당’, 노르웨이 ‘노동당’, 덴마크 ‘사민당’, 스페인 ‘사회당’, 아이슬란드 ‘사민당’, 오스트레일리아 ‘노동당’, 뉴질랜드 ‘노동당’ 등이다. 모두 노동운동에 뿌리를 둔 진보 정당들이다. 그러니까 ‘우물 안 개구리’를 벗어나 시야를 조금만 넓혀서 보면 진보 정당이 여러 차례 집권한 것이 매우 보편적인 상황이고, 그런 경험이 전혀 없는 나라가 특별하고 예외적인 경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노동운동 하던 사람이 정치인으로 변신하는 것은 순수성을 잃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본래 노동운동가의 올바른 선택인 것이다. 다만 나 같은 사람은 그것을 도저히 감당할 자신이 없어 노동운동 영역에 그냥 남아 있을 뿐이다. 같은 지역에서 같은 시기에 노동운동에 참여했던 사람으로서 노동운동의 정치세력화라는 험난한 길을 포기했던 나는 노회찬 님에게 비견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부족한 사람이다. 그래서 감히 ‘노회찬 동지’라고 부르지 못한다. 그런데도 노회찬 님은 나를 다른 사람에게 소개할 때마다 “제가 떠난 노동현장을 계속 지키고 있는 사람”이라고 설명하며 미안해했다. 그럴 필요가 전혀 없는데도 그는 항상 그랬다. 노회찬 님은 그런 사람이다.


타인에 대한 배려와 시선

집회 등 행사가 열리고 있을 때 무대 밑에 한번쯤 가보라고 가끔 사람들에게 권한다. 궂은일이 얼마나 많은지... 행사가 원만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많은 사람이 바쁘게 움직이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무대 밑뿐 아니라 행사장 곳곳에서 현수막을 붙였다 떼고, 홍보물을 인쇄소에서 제때 찾아와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비가 내리면 우비를 챙겨 나눠주는 일 등을 누군가는 담당해야 행사가 제대로 굴러간다.

그런 모습들을 보며 오래 전 결심한 바가 있었으니 “나는 앞으로 어떤 직함을 갖게 되든 무대 위에 올라가 소개받는 ‘내빈’에 속하지는 않겠다”는 다짐이다. 솔직히 그러한 결심은 그 영광스러운 자리에 올라가 소개받는 ‘내빈’이 절대로 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예견한 열등감이나 자격지심의 보상일 수도 있다.

무대 아래에서 사진을 찍거나 하면서 돌아다니고 있으면 무대 위에 올라가 있는 내빈 중에서 “하종강 선생, 올라오세요”라고 부르는 사람이 간혹 있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노회찬 님이다. 마지막으로 그 음성을 들은 것은 2017년 8월 서울 상암동 YTN 사옥에서 열린 ‘해직자가 오네요. 공정방송 ON AIR’ 행사장에서였다. YTN에서 해고된 노종면·조승호·현덕수 기자가 9년 만에 복직하는 기념행사가 성대하게 끝난 뒤 참석자들이 모여 기념사진을 촬영하던 중에도 가운데쯤에 앉아 있던 노회찬 님이 “하종강 선생, 여기 와서 사진 같이 찍어요”라고 몇 번이나 나를 불렀다. 사진 촬영이 끝난 뒤에도 나에게 다가와 “사진이라도 같이 찍지... 에이, 맨날 밑에서 뭐 하고 있는 거에요?”라고 말하던 그 음성이 지금도 귓가에 생생하다.

그가 우리 곁을 떠난 것이 얼마나 슬픈 일이었는지 내가 아는 말로는 감히 표현할 수가 없다. 차마 그의 빈소를 찾아갈 엄두가 나지 않아 망설이다가 마지막 날 겨우 조문했다. ‘이제 우리는 노회찬이 없는 하늘 아래에서 살아가는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 길을 걷다가도 목에 메인다.


김지선 씨에 관한 기억

한 학기에 16개의 강의를 편성해 누구나 신청하면 와서 들을 수 있는 ‘노동대학’을 차질 없이 운영하는 것이 내가 학교에서 맡은 역할이다. 그동안 정의당 주요 인사들에게 강의를 부탁하면 바쁜 와중에도 마다하지 않고 기꺼이 강사로 와 주었다. 심상정 의원, 이정미 대표 등이 차례로 다녀갔고 이제 노회찬 의원이 올 차례라고 준비하고 있던 와중에 그 사건이 터져 버린 것이었다. 강의 15개를 일찌감치 확정해놓고 한 칸을 비워둔 채 며칠을 망설였다.

노회찬 동지의 부인 김지선 씨에게 강의 요청을 하고 싶었지만 상을 당한 와중에 그런 부탁을 하는 것은 도무지 인간의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노동대학 교육과정을 논의하는 운영위원회에서도 “김지선 씨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요구가 많았지만 “이번 학기 말고 다음 학기에 신청하는 것이 예의인 것 같다”는 의견도 만만찮아서 그 결정의 무거운 짐이 나에게 넘어와 있는 상황이었다.

며칠을 그냥 보내다가 개강을 앞두고 더 미룰 수 없는 상황이 됐을 무렵, 김지선 씨가 “노회찬이 마지막까지 지키고 싶어 했던 꿈을 이루기 위해 일어서려 한다”는 내용의 글을 기자들에게 보냈다는 기사를 읽고 용기를 냈다. 연락 부탁한다는 전화 문자를 간단히 보내고 기다렸더니 밤 1시가 다 된 시간에 김지선 씨가 전화를 했다. “11월쯤에 성공회대학교에 와서 강의 하나만 해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더니 김지선 씨는 고맙게도 “그때쯤이면 마음을 추스르고 사람들 앞에 설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면서 어렵사리 허락해 주었다.

노회찬 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내가 “오래전부터 ‘무대 위에 올라가 소개받는 내빈에는 속하지 않겠노라’는 결심을 한 적이 있다”고 말하자 20대 시절부터 나를 보아온 김지선 씨가 말했다. “아주 하종강스러운 결심을 했네, 무슨 그런 결심을 하고 그래. 그냥 올라가서 소개 받으면 어때서...”라고 말해주었다. 부부는 일심동체라고 똑같은 마음 씀씀이가 느껴져 말하다가 목에 메었다. 그렇게 어렵사리 강의가 성사됐고 나는 비로소 교육과정의 나머지 한 칸을 채운 뒤 개강 며칠을 앞두고서야 수강생 모집 홍보물을 허겁지겁 인터넷에 올릴 수 있었다.

그 뒤 김지선 씨가 띄엄띄엄 전화를 했다. “마음이 정리가 될 줄 알았는데... 그렇지가 않네. 아직 아무도 만나지 않고 있거든. 언론사 기자들도 전혀 만나지 않고, 몇분짜리 전화 인터뷰도 하지 않고 있거든... 그런데 사람들 앞에서 두 시간 동안이나 이야기를 제대로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그 대목에서 나는 “강의를 취소하겠다”고 말해야 옳았다. 그러나 뻔뻔스럽게도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김지선 씨가 결국 “그렇지만 거기는 ‘노동대학’이니까... 다른 사람들도 아니고 노동자들과 한 약속이니까... 어떻게든 할 수 있도록 준비해 볼게”라고 다짐하는 말을 듣고서야 전화를 끊었다.

한번은 김지선 씨가 전화를 하더니 긴 얘기 끝에 이런 말도 했다. “아무한테나 할 수는 없는 말인데, 요즘은 가끔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어... 왜 이 세상에 나만 혼자 남겨 놓고 떠났을까... 나 혼자서 어떻게 하라고... 정신 없을 때는 몰랐는데... 요즘은 가끔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어...” 그날도 역시 나는 강의 일정을 취소하겠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김지선 씨가 “그래도 그 강의 약속을 한 게 도움이 될 때가 있어요. 넋 놓고 있다가도 아, 노동자들과 약속한 강의가 있지, 그 사람들을 실망시키면 안 되지, 그런 생각으로 마음을 다잡는 효과가 있는 것 같아요. 노동자들과 한 약속이니까... 어떻게든 준비해 볼게”라고 해 주는 말을 듣고서야 전화를 끊었다. 김지선 씨의 강의 취소 요청 전화는 못되먹은 나 때문에 번번이 실패했다. 지금도 생각하면 너무 미안하고 고맙다.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지금 제 정신이냐? 이런 상황에서 강의를 요구하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항의하는 전화가 올까봐 조마조마했다. 

어느덧 11월이 되어 강의 날짜가 다가왔다. 가족을 잃은 사람이 가장 힘들어질 때가 100일 남짓 지난 그 무렵쯤이라는 걸 우리가 미처 몰랐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강의 하루 전 날 밤에 김지선 씨가 전화를 했다. “지금쯤 되면 마음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될 줄 알았어. 그런데... 그렇지가 않네...” 나는 참 뻔뻔스럽게도 “강의 하루 전에 취소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날도 나는 결국 김지선 씨의 “그럼 준비해 볼게요”라는 답을 듣고서야 전화를 끊었다.

언론사들에서 취재가 가능한지 묻는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정중히 사양했다. 개인 자격으로 강의를 청강하는 것은 가능하겠느냐고 묻는 기자들이 있어서 그것은 가능하다고 답했다. 드디어 강의 당일, 김지선 씨는 고맙게도 우리 학교로 와 주었다. 내가 이틀 전에야 전해 준 수강생들의 사전 질문 내용을 전달받고 김지선 씨는 한숨도 자지 못한 채 왔다고 했다. 연구실에서 잠시 대기하다가 강의 시간이 다 되어 우황청심환을 하나 먹고 강의실로 통하는 계단을 조심스럽게 올라가는데, 한 걸음 앞에서 계단을 오르던 김지선 씨의 무릎이 한번 휘청 꺽였다. 내 눈에는 분명히 그렇게 보였다. 옆에 있던 사람이 급히 부축해 참사를 면했다.

강단에 올라선 김지선 씨가 마이크를 잡고 입을 열었다. “제가 미쳤었나 봐요. 이 강의를 하겠다고 약속을 했으니...” 말을 잇지 못해 잠시 침묵이 흘렀다. 모두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그래도 여기는 ‘노동대학’이니까... 노동자들과 한 약속이니까... 마음을 추스르고 왔습니다.” 강사와 수강생들이 눈가가 모두 촉촉해지기 시작했다. 그 뒤 김지선 씨가 힘들게 말을 이어간 시간은 내가 보기에 불과 10여분 남짓이었지 싶다. 질의응답까지 2 시간 넘게 이어진 그날의 강의는 한마디로 엄혹한 군사독재 정권 시절 15살에 노동자가 되어 18살에 노동조합을 설립한 뒤 40년 세월 동안 온갖 풍상을 겪어 온 노동자의 내공이 절절하게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멀리 독일에서 찾아와 청강한 교포 한 사람은 강의에 대한 소감을 “잘 살아온 삶은 그 자체가 감동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표현했고 수강생들은 ‘최고의 강의’라는 평가를 했다. “다른 강의를 모두 합한 것보다 더 훌륭했다”고 적은 수강생도 있었다. 지금도 생각하면 김지선 씨에게 무척 고맙다. 두고두고 갚아야 할 빚이 또 늘었다.

사람들에게 나를 소개할 때마다 “나보다 내 아내를 먼저 알고 있던 남자입니다”라고 설명하며 웃던 그의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됐다는 생각만으로도 문득 가슴이 미어질 때가 있다.  


우리는 모두 작은 노회찬들이다

그해 여름, 공공기관의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는 일과 관련해 전국에 있는 노조 지회들을 두 달 동안 돌아다녔다. 아랫녘 작은 도시의 비정규직노조 지회장을 맡고 있는 여성 동지가 버스터미널까지 나를 태워다 주며 말했다.

“정규직이 된다고 해도 저는 정년이 다 돼서 혜택을 1년밖에 못 봅니다. 7년 전 노동조합 처음 만들고 그동안 온갖 탄압을 다 당했는데... 관리자에게 잘 보이려고 우리를 그렇게 괴롭혔던 인간들도 우리 투쟁 덕에 모두 같이 정규직이 되겠지만... 그래도 이거 하나는 내가 해놓고 그만둬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끝까지 싸워 볼랍니다.”

그리고 이런 말도 했다. “노회찬 의원 생각만 하면... 너무 분해서 눈물이 나와요.” 터미널까지 오는 동안 둘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눈물만 그렁그렁 맺혔다. 운전을 하느라고 지회장이 손바닥으로 자꾸 눈물을 훔쳤다.

이소선 선생님께 했던 작별 인사를 노회찬 님에게도 똑같이 한다. “편히 쉬세요. 남아 있는 세상은 우리가 어떻게든 해볼게요.” 살아남은 우리는 모두 작은 노회찬들이다. 우리 모두 앞으로 그렇게 살아가자!



- 하종강 (성공회대학교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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