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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 소식

민들레(23호) 노회찬아카이브 <5> 「노동과 진보」를 통해 보는 진정추의 활동과 노회찬

재단활동 2021. 03. 30




※ 노회찬재단 기록연구실에서는 소식지 <민들레>를 통해 ‘노회찬 아카이브’ 소식을 정기적으로 연재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리며, 관련한 기억이나 사료를 갖고 계신 분은 재단 기록연구실로 연락주십시오. 고맙습니다. (02-713-0831 / archivist.j@kakao.com)


 

New 이 달의 새로운 기록


입수일 2021.03.18
수집처 김창희
주요기록 한겨레 21 814호 노회찬 인터뷰 기록 등 4점
진행상황 아카이브 서비스 진행



 


(※ 참조)

노회찬은 1987년 이후 정치 환경의 변화 속에서 한국사회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치부터 바꿔야 하며, 정치를 바꾸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제대로 된 진보정당의 건설이 필요하다고 판단한다. 즉 “①6월 항쟁으로 인한 군부독재세력의 퇴각과 민주화의 진전과 ②노동운동의 고양, ③사회주의 진영의 몰락과 냉전체제의 해체라는 세 가지 측면에서의 정세 변화는 각각 동일한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으니 합법적이며 공개적인 대중정당, 교조적 사회주의를 배제하며 이데올로기적 개방을 정치지형으로 하는 진보정당의 건설이 바로 그것이었다.” (노회찬, 「진보정당 건설과 한국의 노동운동」, 영국 옥스퍼드대 코리아포럼 주제발표문, 1996.5.30.)






Now 노회찬 아카이브는 지금


2021년 1회 온라인 기획전시 만나러가기

진보정당의 목소리 - 
당 기관지와 유인물 속 노회찬의 기록

2021.04.01. ~2021.04.30.
 

노회찬 아카이브가 지난 1월 25일 개관했습니다. 아카이브에는 노회찬 의원의 기록물 목록이 유형별, 출처별, 시기별, 주제별로 찾아볼 수 있도록 서비스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기록을 활용한 다양한 콘텐츠들도 서비스 되고 있습니다.

기록에 대해 소개하고 기록의 뒤편에 숨겨진 이야기들을 발굴하는 다양한 콘텐츠 중에서도 온라인 전시는 특정한 주제와 관련한 다양한 기록을 보여줄 수 있는 콘텐츠입니다. 노회찬 아카이브는 연간 3-4회의 기획전시를 선보일 예정입니다. 지난 1월 개관 기념으로 보여드렸던 3개의 전시 이외에 4월에는 첫 번째 기획전시로, <진보정당의 목소리 – 진보정당 기관지 속 노회찬의 기록展>을 준비 중에 있습니다. 

기획전시를 위해 노회찬 의원이 속해 있었던 정당과 노회찬 의원의 당직을 정리하고 각 정당의 기관지, 이론지를 정리했습니다. 현재 아카이브에서 소장하고 있는 기관지 기록물을 다음과 같습니다.




 

이 기록물 중 노회찬 의원이 직접 작성한 글이나 노회찬 의원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인터뷰 기사 등을 모아서 진보정당의 목소리와도 같은 기관지를 통해 노회찬의 생각과 고민, 지향이 어떻게 드러나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전시가 될 것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비어있는 기록물 중 소장하고 계신 호수가 있다면 노회찬 아카이브에 기증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기증 안내 : 기록연구실 070-5222-6314

 

Story (5) 「노동과 진보」를 통해 보는 진정추의 활동과 노회찬


1992년 4월 15일. 노회찬 의원이 출소한지 2주가 지난 그 날. 진정추, 즉 진보정당추진위원회가 결성되었습니다. 1992년 14대 총선을 위해 정치적으로 결합했던 이질적인 그룹인 민중당과 한노당 창준위(한국노동당 창당준비위원회)는 총선 실패로 후 해체되었고, 노회찬 등 한노당 창준위 주요 활동가들은 민중당을 계승하는 정치조직을 만들어 진보정당운동을 이어가기로 한 것입니다.




<기록 1> 진정추 창립 자료집에 실린 결의문 전문



출범 결의문에는 노동자, 서민의 정당 건설의 목표를 뚜렷이 하고 있습니다. “노동자, 서민이 정치 주체가 되어 여타 정치세력에 대한 배격과 연합과 제휴의 다양한 실천을 벌여 나감으로서 노동자 민중의 정치적 경험을 한충 두텁게 쌓아나갈 것”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노동자 중심의 진보정당’을 위한 조직으로서 진정추의 활동은 진정추의 기관지인 「노동과 진보」와 남겨진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노동과 진보」는 1992년 6월 창간하여 1995년 7월 21호까지 발간되었으며 진정추는 그해 9월 해체되고 ‘진보정치연합’이 창립됩니다. 현재 노회찬 아카이브에는 창간호부터 21호까지 발간물 중 16호를 제외하고 전권이 소장되어 있습니다. 현재 디지털 아카이브에서 「노동과 진보」를 서비스 중입니다. 




<기록 2> 「노동과 진보」 창간호와 제 21호



노회찬은 1기 노동위원장으로, 2~4기 대표로 진정추를 이끌었습니다. 진정추는 창립 당시 ‘노동자 중심의 진보정당 건설’을 목표로 한 정치조직일 뿐 공식적인 정당은 아니었습니다. 1992년 대선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당을 창당할 것을 결의하였으나 창당은 쉽지 않았습니다. 「노동과 진보」 3호에는 창당과 대선 방침을 결정한 제 1회 정기대의원대회(1992.6.27.~6.28. 서울시립대 대강당)에서 결정된 사항이 자세히 실려 있습니다.




<기록 3> 진정추 제 1회 정기대의원대회 사진



이 정기 대의원대회는 ‘창당될 진보정당의 성격’, ‘창당될 진보정당의 당명’, ‘창당 방침’, ‘대통령 선거 방침’ 등이 결의되었고 이는 다음과 같습니다.




<기록 4> 「노동과 진보」 제3호 기사 기록



그리고 그해 7월, 진정추는 민정추(민중진영 단일정당 추진위, 이후 사회당추진위로 이름 변경)>, <민중회의 준비위원회>, <전국노련(<전국노동단체연합)> 등 4개 단체 대표자회의 개최해 <민중후보 추대와 진보정당 건설을 위한 민중연대(약칭 민중연대)>를 결성합니다. 민중연대는 10월 고 백기완 선생을 민중대통령 후보로 추대하고 <민중대통령 백기완선거대책본부(약칭: 백선본)을 발족합니다. 이 때 노회찬은 진정추의 결정에 따라 백선본의 조직위원장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기록 5> 백선본 조직위원장 당시 선거운동관계자신분증명서



백기완 후보는 지지율 1%, 238,648표(1992년 대통령 선거 결과 참조)로 낙선하였고 백선본은 해체됩니다. 그리고 대선 과정 중 창당하고 결의한 1회 대의원대회의 결의사항은 끝내 실패하고 맙니다. 백선본이 구성한 ‘창당추진위원회 구성을 위한 수임위원회’ 수임위원으로 활동했던 노회찬은 「노동과 진보」 9호 ‘수임위원회 해체에 관한 보고’ 기사를 통해 수임위원회 해체를 알리고 통합조직 건설에 관한 안을 제출합니다. 




<기록 6> 「노동과 진보」 9호 ‘수임위원회 해체에 관한 보고(노회찬)’ 



이 기사에서 보듯이 노회찬은 “대통령선거 전까지는 창당을 위한 모든 노력이 대통령선거운동에 도움을 주고 선거운동의 성과를 바탕으로 창당으로 나아간다는 데 초점을 두고 있었으나 그러한 노력이 아무런 결실을 보지 못하고 선거가 끝난 시점에서 창당 논의는 새로운 바탕 위에서 진지하게 전개 되어야 하며, 창당사업이 패배한 선거운동의 단순한 연장이어서는 안되고 선거운동과 그 결과에 관한 엄정한 평가 속에서 창당을 위해 극복해야할 과제를 가려내고 이를 실현시키는 노력 속에서 창당을 준비해 가야 한다”고 밝히며 진정추의 앞으로의 길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노회찬에게 1992년 대선은 창당 실패가 아닌 진보정당으로 가는 길 중 한 걸음이었습니다.

실망하고 있을 회원들을 독려하며 노회찬은 「노동과 진보」 10호에 "창립 1주년을 맞이하여 회원 동지들께 드리는 글"을 싣습니다.


“회원 동지 여러분!
(생략)

에베레스트산을 맨 처음 오른 힐러리는 산에 오른 이유를 묻는 기자에게 “산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는 유명한 답변을 하였습니다. 온갖 고통과 상처에도 불구하고 다시 진보정당 창당을 위해 나선 우리들에게 “왜 진보정당을 건설하려 하느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한국 자본주의와 한국 정치의 현실이 노동자를 비롯한 근로대중의 정치세력화를 요구하고 진보정당의 활동을 요청하고 있기 때문이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경험한 최근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진보정당건설에 대한 사회적 요구는 점점 강력해지고 있습니다. 87년 이래 한국 정치정세의 변화 추세는 진보정당 건설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우리가 제시했던 정세 판단이 올바랐음을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김영삼 정권의 개혁 선풍은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거나 위축시키는 것이 아니라 진보정당 건설의 정당성을 입증하면서 우리를 더욱 분발하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산에 올라야 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중략)

기본노선이라는 것이 곧 목적지까지 갈 수 있는 궤도열차의 승차권을 의미하진 않습니다. 지금 우리가 견지하고 있는 기본노선이란 단지 지도와 나침반일 뿐입니다. “예상하지 못한 창립 1주년”이 말해주듯 작년 1년간 추진된 세 번에 걸친 당 건설 노력은 실패로 끝나고 우리는 다시 출발점에 서 있습니다. 힘든 여정에서 오는 피로를 씻고 체력을 단련하는 것도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만으로 성공적인 등반이 보장되진 않을 것입니다. 이미 우리는 각기 다른 코스로 세 번의 등반을 시도하였습니다. 이제 정상을 향해 어떤 경로를 밟아갈 것인가? 제2기 정기대의원대회는 이 결정을 위한 상당한 시간을 우리에게 부여하였습니다. 이 소중한 시간은 부담스러운 일을 뒤로 미룬 채 휴식과 체력단련을 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 아닙니다. 정확한 등반코스를 잡아내기 위해 최근의 경험을 분석하고 지형과 지리적 조건에 대해 깊이 연구하는 것은 이 기간에 해내야 할 필수적인 과제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독서와 논의로만 해결되진 않을 것입니다. 바깥 정세의 변화와 외교적 노력에만 내맡길 일도 아닙니다. 작은 일 하나하나에서부터 적극적이고 창의적인 시도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경험은 여전히 빈약하며 노력은 충분치 못했습니다. 모든 지역조직, 모든 회원이 모든 분야에서 진취적인 기세로 모범을 만들어 내기 위해 경쟁합시다. 만들어진 모범을 공유합시다.”



3기 대의원대회(1994.3.20.)에서 진정추는 ‘김영삼정권 이후의 정치지형 변화에 대비하고 96, 97년의 권력재편기에 올바로 대응하기 위하여’ 95년 내에 폭넓은 진보대연합에 기초한 진보적 대중정당을 건설하는 것을 결의합니다.




<기록 7> 「노동과 진보」 17호 제3차 진정추 대의원대회 보고



이러한 차원에서 노회찬은 <민주노총> 권영길 위원장과 함께 화합의 길을 모색하는 대담(1994.09.06.)을 진행하기도 하고 시민운동과의 결합을 위해 <참여연대> 박원순 집행위 부위원장과 함께 하는 자리(1995.02.11.)를 갖기도 합니다. 폭넓은 진보대연합을 위해 진정추의 영역을 넓히고자 했습니다. 이때 나누었던 대화들은 각각 「노동과 진보」 19호와 20호에 각각 실려있습니다.

진정추는 1995년 정당을 창당하지 못하였고 <민중정치연합> 내 통합파와 통합하며 <진보정치연합>을 창립하고 그해 9월 해체하게 됩니다. 진정추의 초기 목표대로 바로 진보정당을 창당할 수는 없었지만 ‘노동자 중심의 진보정당’이라는 확실한 목표를 가지고 진보세력을 통합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려 했던 노력은 마침내 2000년 1월 <민주노동당> 창당이라는 결실로 이어집니다. 노회찬은 <민주노동당> 창당으로 평생의 꿈의 반이 실현되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고난의 세월 끝에 당은 창당됐는데, 저는 진심으로 너무 기뻤습니다. 그때 어떤 생각이었냐면, 제 인생의 목표의 반은 이루어졌다, 반이나 이루어졌다. 창당을 한 것만으로도.”(노회찬, 김어준, 진중권 외, <진보의 재탄생: 노회찬과의 대화>, 꾸리에, 2010, 129쪽)


많은 사람들이 2004년 총선에서의 노회찬을 기억합니다. 하지만 노회찬의 그 꿈은 이미 오래 전에 설계되었고 많은 실패와 좌절, 그리고 새로운 다짐 속에 다져져 왔음을 아는 이는 많지 않습니다. 수감생활을 하는 동안 그 진보정당의 꿈을 꾸고 노동자 중심의 정당을 설계했을 노회찬의 바람은 출소 후 <진정추>로 첫 걸음을 시작해 민주노동당을 거쳐 정의당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추>의 활동을 살펴보는 것은 노회찬의 ‘진보정당 건설의 꿈’의 한 걸음을 함께 내딛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지향과 이상은 뾰족하고 날카롭게 벼리되 함께 하는 이들을 확장하고 넓히는 통합의 길은 이후로도 계속 노회찬의 발자취 속에 남아있습니다. 


※STORY 노회찬 기록과 이야기는 노회찬 의원이 남긴 기록과 관련한 이야기를 전하는 코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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