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단 소식
(소식지/창간준비호) 문화인 노회찬 - 시詩투성이 그의 길(장 석님)
(2019.4.25)
카타니아의 벨리니 극장 앞 카페에서 손호철 선생은 얼마 전 펴낸 쿠바 여행기인 '카미노 데 쿠바'에 대해 이야기 하였다. 작년 여름, 여정을 마치고 귀국하자마자 노 의원의 비보를 접했다고 했다. 그가 이 말을 꺼낸 것은 점심을 했던 식당에서 오랜 세월 고인의 동지이자 조언자였던 선생에게, 나는 노회찬의 친구라고 소개드렸기 때문일 것이다.
몸집이 참 크고 장수처럼 보이는 정치학자 손호철 교수는 코코아를 주문해 마시며, 쿠바 여행에 정말 가고 싶어 했으나 그럴 수 없었던 고인과 마음으로 온 여정을 함께 했었노라고 안타까워 했다. 그때 내내 맑고 푸르던 시칠리아 항구도시의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몰리고, 포도에는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돌아오자마자 책을 사서 펼쳐 보니 글머리에 고인에 대한 사랑의 헌사가 놓여 있다. 불현듯 몇 해 전 손 교수의 '레드 로드 - 대장정 13800Km'라는 책을 참고서 삼아 몇 차례에 걸쳐 고인과 중국 홍군의 대장정 루트를 답사했던 추억이 밀려온다. 이러한 길 위의 인연이 이어지고 있구나.
내 기억으로는, 고인이 갔던 모든 길에는 시가 자갈처럼 발부리에 차였으며 노래가 바람처럼 일곤 했다. 그는 정치는 예술과 함께 일해야 한다고 제대로 깨달은 사람이었다. 천성도 그러했을 터이고, 드문 행운으로 일찍 배울 수 있었던 첼로와 대단히 열심히 책을 읽으며 또 친구들과의 시간 속에서 예술에 마음이 더욱 이끌리었다. 시를 모르는 것은 참 부끄러운 일이라는 생각이 그의 한 면을 만들어 갔을 것이다. 정치인으로서 현실의 문제에 대한 참으로 탁월한 판단력과 정의롭고 아름다운 미래에 대한 굳은 믿음과 열정 그리고 타인들, 특별히 약자에 대한 공감의 힘은 여기서 뿌리 내렸으리라.
정치적 감수성과 미적 감수성이 어찌 생판 다른 것일 수 있겠는가. 오히려 좀처럼 알아채기 어려운 악의 순환 형식을 예술가는 직관으로 분별할 수 있으니, 양극화와 불공정 그리고 끊이지 않는 전쟁의 폭력을 일으키는 우리 시대의 악한 주제의 변주를 그이만큼 날카로운 예감과 분석력으로 청음했던 정치인이 달리 있었던가.
지난 주말에도 광화문 광장에서 수많은 노인들이 손에 손에 깃발을 들고 소리 지르며 행진하는 모습을 보았다. 봄날의 좋은 빛이 가득하고 라일락꽃 향기 날리는 그 시간 그 곳에서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듯, 그들은 기실 두려움 속에서 깊은 어둠 속으로 골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마치 하멜른의 아이들처럼. 악은 자신의 고전적인 주제를 피리 부는 사나이 대신 선동 정치가를 통해 무지와 분노와 구별과 증오로 변주하고 있었다.
시인들이 그러하듯 노의원은 낡은 가치와 가짜 진리를 전복을 통해 발가벗기고 물리치고, 새롭고 참된 것들을 드러내려 하였다. 그의 쉽고도 친근하며 기품에 찼던 말들이 퍽 그립다.
1980년 벽두, 내가 어느 신문사의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첨되어 시를 쓰는 삶을 살리라 서원을 했을 때, 그는 발신국이 서울고대이고 1980.1.8 서대문우체국의 소인이 찍혀 홍제동의 우리 집으로 배달된 경축전보를 보냈다. 발신인은 노지심이라 되어 있었지만, 우리 모두가 그 당시 그를 아껴 부르던 별명이었고, 전보의 내용은 "고대하시던 옥동자를 보셨다니 반갑고 기쁩니다"
페미니스트로서의 그의 명예를 다소 훼손한다는 걱정이 없진 않지만, 세월 오랜 그의 따뜻함과 악의 없는 웃음이 새삼 생각나 적어 본다.
애써 얻어 잘 키우겠다고 서원했던 그 옥동자를 나는 못나고 무책임하게 마치 의붓아비처럼 거두지 않아, 특히나 그에게 무람하곤 했었다. 늦게서야 뜻을 다시 세워, 시를 한 편 만들면 누구에게 보다도 먼저 보이곤 했는데, 그 즐거움은 계속 이어 나가고 싶다. 그리스 시인 카바피스의 한 구절을 빌어 그는 내게 얘기해 줄 것이다.
기도하라 길이 길기를
숱한 여름 아침 있기를
<이타카>
2017년 5월 30일 오전 6:49 노의원의 트위터
해질 무렵 어릴적 친구가 시 한편 보내왔다.
허락도 안받고 이곳에 올린다.
기억을 파는 푸줏간
언제를 드릴까
해가 다한 어스름이고
나는 시간을 끊는 푸주한에게 부탁한다
제일로 좋은 부위
내 유년의 다습부터 여듭까지 한칼
뼈도 비계도 없는 뙤살
그리고 아내 얻고 아이들 얻기까지
또 한칼
순정한 뼈와 피의 부위
이제 무엇으로 셈을 치루나
점포는 붉어지고
밖은 더욱 어두워진다
여기 있소
스무 살의 한 점은 그냥이오
아프고 서툴던
사랑의 자투리
* 필자의 추천곡을 함께 게재합니다.
César Franck - Symphonic Variatio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