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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 소식

민들레(32호) 후원회원 이야기 - 다큐영화 ‘노회찬 6411’을 보고

재단활동 2021. 12. 29




후원회원 이야기

다큐영화 ‘노회찬 6411’을 보고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과 황동혁 감독의 ‘오징어게임’이 세계를 흔들었다. 이 두 작품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우선 두 작품 모두 빈부의 차를 다루었다. 기생충은 상위 10%와 하위 10%간에 일어나는 이야기라고 하면, 오징어게임은 상위 0.1%와 하위 0.1%의 이야기이다. 영화에서 부자는 공간적으로 위에 위치하는데, 빈자들은 반지하나 카메라가 내려보는 아래 공간에 머문다. 또한 비현실적인 살육장면이 인상적이라는 점이 닮았다. 기생충에서는 마지막 부분에서 우발적으로 부자와 빈자가 서로 죽고 죽이는 장면이 나온다. 이는 부자와 빈자가 한 공간에서 존재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이와 다르게, 오징어게임에서는 믿을 수 없는 재산을 가진 0.1%의 부자인 VIP들이 주도면밀하게 계획하여, 하위 0.1% 빈자들인 ‘경마장의 말’이 살육되는 것을 즐긴다. VIP들은 공간적으로 완전하게 분리되어 일방적으로 경마장의 말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바라본다. 미셀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말하는 파놉티콘(panopticon)구조이다. 병원과 감옥의 구조이다. 환자와 죄수는 일방적으로 감시당하는 공간을 벗어날 수 없다. 

우리 대부분이 일생동안 해온 일을 아주 단순하게 표현하면 부자 계층으로 가려고 애쓴 것이다.(좀 억울하신가? 나는 그랬다.)  그와는 반대로 노회찬이 하였던 것은 빈자에게 다가간 것이다. 그래서, 다소 황당하게 들릴지 몰라도 봉준호와 황동혁이 노회찬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해본다. 실제로 봉준호는 ‘노회찬6411’에서 여러 번 나온다. 또한 ‘오징어게임’의 대표적인 미장센인 거대한 돼지저금통이 민주노동당의 어느 행사 장면에서 나온다. 우리나라에 정치가가 많다. 그러나, 세계적인, 아니면 전 인류사적인 이슈를 일생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견지한 정치가는 극소수이다. 그는 정치가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정으로 모두가 인간적인 삶을 누리게 하기 위해 살았다. 모두 같이 자유인, 문화인, 평화인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뜻하지 않게도, 우리나라 최초로 아카데미 작품상을 타게 했고, 넷플릭스가 서비스되는 83개 모든 나라에서 1위 콘텐츠가 되게 하는 사건을 일으키는데 역할을 하였다.(지나친 비약인가?) 재미있고, 공감이 되기 때문이다. ‘노회찬6411’은 이 두 작품에 비하면 너무나도 직설적인 다큐멘타리이다. 그런데, 재미있고, 매말랐던 정의감을 자극한다. 때론 눈물 글썽이고, 때로는 웃다보면 2시간 15분이 금방 흘러 지나간다.  

Bartle이라고 하는 학자는 멀티플레이어 게임에서 플레이어의 역할을 크게 killer, achiever, socializer, explorer로 나눈다. 사람들이 현실에서는 못하지만 게임에서는 해보고 싶은 역할이다. 우리 하나하나가 우리의 일생에서 못 했지만, 노회찬처럼 해보고 싶었던 역할이 있지 않을까? Bartle이 플레이어의 역할을 나눌 때, 두 가지 축을 정의한다. 한 축은 사람(player)을 상대하는 것인가, 세계(world)를 상대로 하는 것인가이고, 또 한 축은 행동(action)을 하는 것인가 상호관계(interaction)를 하는 것인가이다.

Killer는 player를 상대로, action을 하는 역할이다. 다른 player과 경쟁해서 승리하는 것이다. 게임을 잘 모르는 부모들은 아이들이 이 역할에 과도하게 빠지는 것을 걱정한다. 영화에서는 노회찬이 이 역할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 2007년 민주 노동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권영길, 심상정에게 패배한 것은 그가 자기 편 사람을 만든다거나, 상대방 후보를 비방하는 등 killer로서의 노력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노회찬은 achiever의 역할을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Achiever는 world를 상대로 action을 한다. 간단하게는 퍼즐게임에서 이기는 것이 한 예이다. 역사적으로는 세종대왕이 위대한 achiever였다. 노회찬이 achieve하고 싶었던 것은 사회주의를 이 땅에 심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사회주의 이념자체가 아니라, 사회주의가 이루려 하는 차별없는 사회의 건설이다. 앞으로 전세계 모든 회사들이 도입할 수 밖에 없는 ESG(Environments, Social, Governance)에서 Social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는 20대 초반에 차별이 일상이던 노동의 현장에 뛰어들었다. 용접기술자 자격증을 따서 정식으로 취업하였고, 그것을 정광필이에게 엄청 자랑하였다고 한다. 차별을 고착화시키는 주범인 떡값검사들의 행태를 모두에게 알리다가 국회의원직을 박탈당하기도 하였다. 안다는 것과 행하는 것의 불일치를 부끄러워 했다. 국회의원으로서 회찬이는 보좌관들을 혹사시켰다. 그가 achieve하고 싶은 일을 이루는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의 보좌관들은 아직도 그에 대해서 얘기하면 눈물을 글썽인다. 그는 위대한 socializer였기 때문이다. 

Socializer는 player를 상대로 interaction한다. 컴퓨터 게임에서는 다른 player의 상처를 낫게 하는 healer(게임 용어임)나 멘토가 그 예이다. Socializer로서 그는 상대방의 얘기를 오랫동안 들어주고, 자신의 얘기를 강요하지 않고 설득력있게 얘기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으면, 오랫동안 다방면으로 해결하려고 구체적으로 노력하였다. 그와 가장 가까이 있었던 무학의 운전기사는 항상 자신의 얘기를 끝까지 들어주는 그에게 깊게 고마워한다.  장애인들은 남산 케이블카를 탈 수 있는지 알아보러 같이 남산에 갔던 그를 기억하고, 시각장애인들은 그들의 안마사 자격을 보호하는 것에 헌법적인 걸림돌을 제거하려고 애를 쓰던 그를 얘기한다. 노동자 시위에서 그는 같이 비를 맞으며 어깨동무하고 있었다. 그와 같이 심각한 순간에도 그는 상대방을 환하게 웃게 하는 스킬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그의 경쟁자에게도 해당되는 얘기이다. 영화에서 몇번 TV 토론회 장면이 나오는데 촌철살인의 멘트에 상대방도 미소짓고 있다. 외치는 것 자체가 아니라 그 외침으로 사회가 바뀌는 것을 원했기 때문에 상대방이 어떻게 느끼는가도 그에게 중요했던 것이다.  창원에서 국회의원후보로 나섰을 때는 ‘진박’이 되는 것이 목표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왜냐하면 박근혜의 공약내용이 가장 자신이 이루고 싶은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물론 박근혜는 그녀의 공약과 반대로 하다 감옥에 갔다. 

그는 6411을 타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서 투명인간이라는 것을 알렸다. 그런데, 그가 진정한 socializer인 것은 그 투명인간들에게 정의당이 투명정당이었다라고 말하는 대목이다. 자신이 무엇을 할 것인가를 항상 돌아보는 것이다. 그가 좋아한 말. ‘무감어수감어인(無監於水監於人), 물에 자신을 비추지 말고, 사람들 안에 자신을 바라보라.’   

Explorer는 world를 상대로 interaction한다. 새로운 발견을 즐기는 것이다. 영화를 같이 본 진성이가 호지명의 좌우명이 지벗비엔 응번비엔 (以不變 應萬變)이었다고 한다.  변하지 않는 것으로 변화에 대응한다는 말이다. Socializer로서 회찬은 바뀌지 않으면서, 모두다 자유인, 문화인, 평화인이 되는데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찾는 데는 항상 열려 있었다. 영화에서 과거의 필름을 보여줄 때, 영상에 수평으로 미세한 선들이 보인다. 이것은 비디오 디스플레이 방식이 달라서 그렇다. 과거의 interlaced 방식으로 녹화된 필름을 현재의 progressive방식으로 보면 그렇게 보인다. 그는 interlaced 방식의 필름에서나 최근 찍은 progressive 영상에서나 웃음을 잃지 않고, 헤쳐 나가는 호기심 많은 explorer였다.  용접의 특수 스킬중 하나를 익혔다고 광필이에게 자랑했다는 것이나, 교도소에서 야쿠르트로 만든 막걸리도 재미있는 일 예이다. 

그런 그가 죽었다. 그리고 3년이 지났다. 그보다 더 산 3년이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생각해본다. 3년동안 나는 killer, achiever, socializer, 또는 explorer로 무엇을 하였나? 영화에서 56년생 동갑내기 손석희는 회찬을 추모하면서 ‘부끄러움’을 아는 것을 말하며, 울컥 했다. 나는 요즘 부끄러운 것, 슬픈 것, 불쌍한 것에 무감각해지려고 노력한다. 아니, 어쩌면 이미 무감각해져 있다. 그러고 보면 광필이가 영화에서 얘기한 ‘낭만’을 찾으려는 노력도 이제 희미해져 가는 거 같다. 영화가 끝나고 제창이는 목디스크 진단을 위해 MRI 찍으러 갔다.  제창이 증상의 대처방법에 대해 다들 할 말이 많았다. 우리 모두 이제 육체적으로 어딘가 아프다. 그런데, 정신적으로는 어떤가?

진성이와 무현이와는 백세주마을에서 족발과 파전에 술한잔하였다. 우리는 ‘대학생 농활 때 밥풀 하나를 버리지 않고 집어먹던 예쁜 음대생’도 얘기했고, 기후 위기에 대해서 겁나는 얘기도 했고,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너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도 얘기했다.  Memento mori, 노회찬이 죽었듯이 우리도 언젠가 죽는다. 그럼 ‘자유로운 나’로서 진정한 플레이어가 되려고 애를 써야 하는 걸까? 아니면, 플레이어로서의 역할을 하나씩 내려놓는 연습을 해야 하는 걸까?


- 서덕영 (경희대 전자정보대학 교수, 경기고 72동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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