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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 소식

민들레(37호) 후원회원 이야기 - 회찬이형은 첼로를 켜고…

재단활동 2022. 06. 02



후원회원 이야기

회찬이형은 첼로를 켜고, 저는 장구를 치고 신명나게 놀아 봅시다



노회찬재단 운영실장 박규님의 후원회원 원고의뢰를 받고, 몇 번을 썼다 지웠다를 하다가 ‘그래! 그냥 있는 그대로 써보자’하고 그냥 적어 봅니다.

노동자, 농민, 장애인, 성소수자, 여성 등등 이 땅의 약자들의 인권과 정의를 위하여 철이든 이후에 한결 같은 길을 걸어온 노회찬! 언젠가는 그가 가는 길을 같이 걸어야지하고 마음을 먹었었는데 그 기회를 너무도 빨리 걷어간 야속한 노회찬!

정확한 기억으로는 언제인지 모르지만 노회찬 전의원과의 첫 인연이 평범하고도, 강렬하게 남아 있습니다.

네거리 건널목에 서 있었습니다. 신호대기에 걸린 차의 조수석 창이 내려져 있었습니다. 조수석에 앉은 이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눈이 마주친 그는 씨익하고 웃으며 고개를 숙여 저에게 인사를 했습니다. 먼저 인사를 받은 저는 그에게 “안녕하시죠? 어디 가세요?”하고 인사를 했습니다. 그는 “여의도에 갑니다.”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신호가 바뀌어 “안녕히 가세요?” 인사를 던지고 ‘누구지?’하고 고개를 갸웃하며 건널목을 건넜습니다. ‘맞아! 노회찬이야!’ 생각이나 고개를 돌려보니 그가 탄 차는 사거리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정치인이 그 것도 국회의원이 시민에게 먼저 웃으며, 인사를 한다고...’
이렇게 생각한 저는 그 때부터 노회찬 전의원을 제 이웃으로 여기기로 했습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말뿐이 아니라 몸에 배어있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2018년 7월 23일 점심시간이 미처 못된 시간에 포천에 사는 23년 연상 길동무 우부 강창수 선생께서 울먹이는 목소리로 “최동무님! 노회찬의원이 죽었답니다. 나도 죽고 잡소...”라고 한탄을 했습니다. 저도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줄 알았습니다.

날마다 세브란스 장례식장의 모습이 뉴스에 나오는데 차마 장례식장에 가볼 생각을 못했습니다. 그러다 7월27일 국회에서 있었던 장례식장을 다녀왔습니다.

장례식장을 다녀와서 남긴 낙서를 옮겨 적어 보겠습니다.

...

다산 정약용 선생의 조승문을 따라 하다.

조선문(弔蟬文)-매미를 조문하다.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도
매미는 뜨겁게 울었습니다.
2018년 7월 27일 국회 뜨락에도
매미는 뜨겁게 울었습니다.

회찬이형! 당신을 보냈습니다.
마지막으로 국회의원 사무실로 들어가는
형의 영정에게
인사를 올렸습니다.
“회찬이형! 잘가!”
매미의 뜨거운 울음이
제 울음을 감추어 주었습니다.

2018년 7월 30일 아침
집 앞 계단에 매미가 떨어져 있었습니다.
개미 몇 마리가 매미에게 달려듭니다.

알로 태어나 나무에 붙어 1년을 살다가
이듬 해에 부화하여 유충이 되어
제 발로 땅속에 들어가
5~7년에 네 번의  변태를 거듭합니다
땅에서 나와
나무에 매달려 허물을 벗고
우화하여 매미가 됩니다.
이제는 고작 남은 날이
시오일(15일어름)이라
짝을 찾아 사랑 나누고 하늘로 다시 돌아가기 바쁩니다.
유충의 95%는 땅에 떨어지는 과정에
성충이 되어서는 살아 남은 반이
먹이사슬 위에 있는 여러 생물들에 먹이가 됩니다.
그 중에 또 반은 사랑할 매미를 만나지 못합니다..
그리하여 수컷 매미는 암컷을 찾아 울어댑니다.
목청껏 울어대도 반은 암컷을 만나지 못합니다.
하물며 소리가 없는 암컷 매미는 어떨까요?

그저 매미소리는 녹음을 노래하는 자연의 교향곡이었습니다.
매미의 일생을 알고는 새는 지저귀고, 짐승은 짖는데 
매미가 우는 이치를 이제는 알겠습니다.
2018년의 매미의 울음은 더 처연합니다.
회찬이형! 당신을 보낼 준비가 안되어서 더 그런가 봅니다.

...

노회찬재단 가입은 날짜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영화 [노회찬6411] 제작과 관련하여 후원회원을 모집하는 기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후원회원 가입하고, 온라인 소식지도 받아 보고, 요리하는 노회찬 의원을 그린 책도 받아 보고, 달력도 받고, 마우스 패드도 받고, 음반도 받고, 그리고 영화[노회찬6411]과 [너에게 가는길]도 관람했습니다. 아직 강연회와 정치학교에는 참여하지는 못했습니다. 아차차! 생일날에 생일축하 문자도 받았습니다.

특별히 노회찬재단에 특별히 바라는 일은 없지만, 생전 노회찬의원의 인터뷰 중에서 “독거노인과 목욕하기 같은 몸으로 하는 봉사를 하는 삶을 살고 싶다”처럼 이제 코로나가 거의 끝나가니 그런 몸으로 하는 봉사 일정이 있으면 노회찬재단 가족, 동지들과 같이 하고 싶습니다.

“형이 이야기했던 많은 말 중에 제게는 비수 같은 말이 있습니다.
나라가 나라다우려면 국민 누구나가 악기 하나 씩은 다를 수 있어야한다고 그랬지요.
형! 다행히 5일장을 하신다니 형에게 마지막 인사는 드릴 수 있겠습니다.

저도 올 해 안에 기타를 시작하겠습니다.
나라 같은 나라를 만들어 나가겠습니다.
회찬이형! 부디 하늘에서는 폼도 잡아가시며 지내시길 바라겠습니다.”

노회찬의원 돌아가셨다는 소식에 그 날 밤에 남긴 일기장 안에 한 구절입니다.
기타는 배우지 못했고, 4월 달부터 장구를 배우고 있습니다.
우리 다음에 만나면 인사만 나누지 말고 회찬이형은 첼로를 켜고, 저는 장구를 치고 신명나게 놀아 봅시다. 

머리에 석남꽃을 꽂고 네가 죽으면...


- 최지훈 (재단 후원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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