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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41호) 문화인 노회찬 - 나의 형 노회찬, 그의 추억

재단활동 2022. 10. 06




문화인 노회찬

나의 형 노회찬, 그의 추억


 

내가 노회찬 선배를 처음 만난 건 30여년 전인 1990년 겨울 서울구치소에서다. 당시 서울구치소는 온갖 조직사건 관련자들이 있었고, 특히 연이은 3당합당 반대 시위로 구치소가 이른바 해방구 수준이었다. 통방이 자유로웠고 옆사동 나들이도 가능했다. 형이 확정된 기결수가 구금되어 있는 교도소와 달리, 미결수가 있는 구치소는 매우 엄격하게 관리운영되었는데, 당시는 평상시와 다른 매우 이례적인 상황이었다.

옆사동에 갔던 적이 있는데 노회찬 선배가 나를 불렀다. 간수에게 양해를 구하고 그 방에 들어갔더니, 육개장을 먹으라고 했다. 사식으로 들어왔다는데, 본인은 구치소에서 나온 관식만 먹겠다고 했다. 당시 내 몸무게는 100kg 남짓이었고, 늘 배가 고팠다. 노 선배가 준 육개장을 정말 맛있게 먹었다. 한동안 계속된 그 호사, 노회찬에 대한 추억의 첫 장이다.

출소하고 난 후 나는 대한민국 최초의 정치컨설팅 사업을 하며 분주히 살았다. 노 선배는 진보정당을 창당하고 꾸리는 일에 매진한다는 얘기를 듣곤 했다. 2002년 대선에서 민주노동당은 권영길 전 민주노총위원장을 후보로 선출했다. 민주노동당은 그 해 지방선거에서 8.6%인가를 득표해서, 대선 후보 TV토론에 이회창, 노무현 후보와 함께 권영길 후보가 당당히 참여하게 된다. 진보정당 정치인이 처음으로 TV토론을 통해 전 국민에게 선보이게 된 것이다.  

1995년 서울시장 선거부터 시작된 TV토론은 1997년 대통령 선거를 거치며 가장 영향력 있는 선거캠페인으로 자리잡았다. 노회찬 선배의 부탁으로 2002년 대선 TV토론을 도와드렸다. 3차례 토론이 있었는데, 저희 사무실에서 몇 분이 함께 보며 평가를 하고 개선점 등을 포함한 보고서를 만들었다. 내가 진보정당 활동을 한 것은 아니지만, 한국정치에 진보정당은 꼭 필요하고 더 좋은 나라를 위해 가는 길에 보수정당들을 견인해나갈 것으로 믿고 있었다.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다.

당시 권영길 후보는 특유의 온화한 이미지에 “국민여러분, 행복하십니까?”란 복지국가 메시지로 전 국민에게 일대 충격을 안겨주었다. 뿔달린 빨갱이가 아니라 누구보다도 품격있던 신사였고, 때론 논리로 때론 감정에 호소하면서 차분하게 TV토론을 해나갔다. 지금은 복지국가에 대해 많이들 알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아주 생소한 개념이었다. 이후 2007년 대선에서 민주당 정동영 후보, 2012년 대선에서 한나라당 박근혜 후보 등이 ‘국민행복시대’ 주장을 이어가게 된다.

당시 노회찬 선배는 밥을 안먹어도 활력이 샘솟을 정도로, 새로운 사회를 위해, 국민의 권리를 위해 역동적으로 일했다. 2004년 총선은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으로 열린우리당이 과반을 넘긴 선거였고, 민주노동당이 최초로 국회에 진출한 선거였다. 그 선거에서 노회찬 선배는 비례대표로 출마해서 마지막까지 10선을 노리던 자민련 김종필 후보와 시소게임을 벌이며 당선되었다.

2004년 총선은 처음으로 1인2투표제가 실시되어, 1표는 지역구 후보에게 1표는 지지정당에 투표하고, 정당 투표의 지지율로 비례대표 의원이 선출되었다. 선거를 앞둔 민주노동당 총선 출정식에서 나는 외부 강사로서 전국의 출마자들을 대상으로 선거전략 강의를 했다. 물론 노회찬 선배의 추천이었다.

내가 말한 전략은 ‘총선을 대선처럼’이었다. 선택과 집중으로 당선가능한 민주노동당 거점 지역에 총력을 기울이고, 모든 후보들은 대선후보가 하듯이 통일된 정책공약을 내세우면서 새롭게 도입된 비례대표 제도, 즉 지지정당 투표에 집중하자는 것이었다. 당시 30~40대를 중심으로 야당 성향의 젊은 층들이 1표는 민주당 후보에게, 1표는 민주노동당에 투표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선거에서 노회찬 선배가 TV토론 등에서 주창한 “낡은 정치의 불판을 갈자”란 메시지는 엄청난 파장과 감동을 준 바 있다.

그 후 노원병 국회의원 선거, 서울시장 선거, 창원 국회의원 선거 등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노 선배를 도우며 함께 했었다. 당시 사석에서도 늘 후배들에게 존대말을 쓰는 노 선배에게 ‘그러면 거리가 생긴다’고 말하니 몹시 당황해 하던 선배의 모습, 내게 깊은 여운을 남겼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노 선배를 기리며 재단도 만들고 ‘6411 정신을 계승하자’고 하는 모습이 너무 좋아, 나도 평생회원으로 가입해있다. 우리 정치에서 진보정당이 난맥상을 겪을수록, 노 선배에 대한 진한 그리움이 되살아난다. 그 뜨거운 열정, 그리고 늘 해맑은 모습으로 특유의 유머를 겯들이며 함께 하는 사람들을 훈훈하게 만들었던, 정말 나라를 맡기고 싶은 지도자였다.  

노회찬 선배는 내가 ‘폴리뉴스’를 창간하고, 세월호 이후 국회의원들과 ‘상생과통일 포럼’을 만들어 리더십 최고위 과정과 정기 심포지엄을 운용할 때, 축사로 그리고 열띤 강의로 늘 함께 해 주셨다. 그에 대한 감사도 제대로 전한 바 없지만, 그 이전에 형이 없는 내게 노 선배는 영원한 나의 형이었고, 큰바위 얼굴이었다. 형이 못다한 일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해 본다. 

사랑해 나의 형 노회찬. 


- 김능구 (폴리뉴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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