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단 소식
소식지(2호) 음식天國 노회찬 (2)옛날통인감자탕
음식天國노회찬
<2>옛날통인감자탕집에서
서울 서촌에 옛날통인감자탕집(종로구 자하문로11길 34)이 있다. 통인시장 안에서 동네쪽으로 난 골목길 한 켠에 소박한 글씨로 감자탕이라고 쓴 조그만 간판을 내건 식당이다. 큰 길이 아닌 주택가 안쪽에 있어 동네사람들이나 시장사람이 아니면 알기 쉽지 않을 것 같은데, 감자탕 애호가들 사이에선 꽤나 이름난 집이다. 그럼에도 그 흔한 유명인 방문 글귀 하나 걸려 있지 않다. 실내장식도 간략한 메뉴판이 전부인 것이 영락없는 동네식당이다. 밖에서나 안에서나 40년 가깝다는 이 집의 역사를 알아차리기 쉽지 않은 점이 오히려 어떤 아우라를 만들어내고 있다.
노회찬의 음식편력에 이 집이 언제 처음 등장했는 지는 그가 없는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다만 노회찬의 오랜친구 이성우(일빛출판사 대표)의 기억에 따르면, 대학시절 노회찬은 지금의 서울시경 자리 부근에 있던 감자탕집을 알고 있었고, 이 집도 1980~90년대 어디쯤인가부터 그의 손에 이끌려 왔었다고 한다. 노회찬의 고교동창 김창희(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건립위원·언론인)의 기억도 비슷하다. 서촌을 중심으로 서울의 역사를 다룬 스테디셀러 <오래된 서울>(2014)의 저자이기도 한 그가 덧붙인다. “이 집 감자탕은 깨끗하고 깔끔한 맛이 그만이야. 회찬이가 좋아할 만 했고, 나 역시도 다녀본 집중에선 최고로 치지.”
(일러스트 : 김경래)
옛날통인감자탕집의 특징은 담백한 국물맛에 있다. 돼지등뼈를 삶아 육수를 낼 때 조미료는 물론 한약재 따위의 첨가물을 일체 쓰지 않는다. 신선한 양질의 돼지등뼈에 마늘과 굵은 소금을 넣고 가스불에 서너시간 푹 끓여내는 것이 전부다. 재료에 흔히 첨가되는 들깻가루도 식탁에 보이지 않는다. 이러니 국물맛이 깔끔하지 않을 수 없다. 밑반찬도 마찬가지. 젓갈을 일체 쓰지 않는다. 심지어 새우젓도 안쓴다는 김치는 시원한 맛이 그만이다. 주인 장경석씨는 “아버지는 전남 함평이시지만, 어머니가 경기도 이천분”이라고 소개한다. 어머니가 음식을 전담했으니 이 집 맛은 경기도 내륙의 음식전통에 바탕을 두고 있을 듯 하다. 물론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경기도 분이지만 일찍부터 서울에 나와 음식장사를 하시면서 보고 들은 것이 많으셨다.” 장씨에 따르면 이 집 업력은 36년째. 1983년 당시 한 할머니가 하던 감자탕집을 부모님이 인수했다고. 특별한 비법을 물려받은 것은 아니었고, 그때까지 백반집 등 음식장사를 해온 어머니의 눈썰미와 손맛으로 이 집만의 감자탕 맛을 찾아냈다. 오래 가게를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욕심을 내지 않은 것”. 식당이 꽉 차면 30명 정도되는 규모로 팔만큼만 팔고 문을 닫는 동네식당식 운영을 해온 점이 오래도록 자기만의 맛을 지켜온 비결이 되었을 것 같다.
이성우의 회고처럼 일찍이 문화 다방면에 조예가 남달랐던 노회찬에게도 감자탕의 연원은 탐구의 대상이었던 것 같다. “성우는 대학시절 향린교회를 통해 회찬이를 알게” 됐다. 70년대 향린교회는 의식있는 학생들의 아지트. 그들은 ‘세미나’가 끝나면 종종 뒷풀이를 근처 장교동의 한 감자탕집에서 하곤 했는데 “살점도 별로 없고 맛도 별로”였다고 한다. 이때 회찬이가 “진짜 감자탕을 알려주겠다”며 성우를 데려간 집이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사직동의 한 감자탕집이었다고 한다. 거기서 회찬이는 “마이크 체질의” 성우를 한 수 “지도”한다. “감자탕은 말야, 감자가 들어가서 감자탕이 아냐. 돼지등뼈(또는 등뼈 속의 척수) 부위 이름이 ‘감자’야. 그래서 감자탕이야.”
노회찬은 박학한 독서인이자 행동가였다. 고 정운영 선생이 노회찬을 인터뷰한 <우리시대 진보의 파수꾼 노회찬>에 친구 정광필(전 이우학교 교장)이 학창시절의 노회찬을 회고한 부분이 있다. “뛰어난 유머감각, 엄청난 주량, 어느 분야든 두루 꿰는 잡학다식으로 모든 사건 사고의 중심에 그가 있었다.” 하지만 타고난 재능만 믿지는 않았다. 박규님(노회찬재단 운영실장)은 “언젠가 노 의원님이 무슨 이야기 끝에 국어사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섯번 이나 정독한 경험을 들려주기도 했다”고 기억한다. “회찬이는 무슨 주제든 막힘이 없었다. 좌중에 어떤 화제가 나와도 그걸 소화해서 나름의 관련 지식과 견해를 내놓았다. 세상사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열심히 학습하고, 그걸 남에게 쉽게 설명해냈다. 그런 능력을 두루 겸비하기는 정말 쉬운 게 아니다. 그렇다고 척하는 일도 없었다.” 김창희의 이런 회고에 이르면, 묵묵히 박시제중博施濟衆을 지향하는 이상적인 선비의 모습을 그에게서 떠올리는 것도 어렵지 않다.
감자탕은 보통 얼큰하게 먹으며, 돼지뼈 사이의 살과 골수를 발라먹고 국물과 함께 감자를 먹는 재미가 쏠쏠하다. 남은 국물에 밥을 볶거나 말아먹는 맛도 빼놓을 수 없다. 해장국으로도 좋고, 저녁엔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하는 식사겸 술안주로도 그만이다. 식재료나 먹는 방식 등에서 한국의 대표적인 서민음식으로 손꼽을만 하다. 본래 삼국시대 돼지 사육이 성행한 전라도 지방에 유래를 두고 있는 감자탕이 지금같은 음식 형태를 갖추게 된 계기는 개화기 노동자의 음식으로 정형화되면서부터다. 한식재단이 펴낸 <맛있고 재미있는 한식이야기>에 따르면, 감자탕은 1899년 경인선 철도공사 때 많은 인부들이 인천으로 몰리면서 시작됐다고 한다. 돼지잡뼈를 우린 국물에 우거지, 감자 등 한꺼번에 넣고 끓여낸 뒤 많은 사람들이 배식하듯 나눠먹었을 이 음식은 곧 인천항만 부두노동자들의 인기메뉴로 자리잡았고 점차 다른 지역으로도 퍼져나가 오늘날같이 전국적으로 즐겨먹는 음식이 되었다.
한사람의 품격있는 문화인으로서 노회찬의 ’달란트’는 많은 부분 부모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음악과 문학과 음식만이 아니다. 노회찬이 노동운동을 시작한 것을 안 어머니는 그때부터 노동관련 신문기사를 스크랩했다. 20년치 20권의 스크랩은 노회찬이 국회의원되자 아들에게 전해졌다. 이런 일은 아들도 “즐긴 수법”이었다. 신춘문예에 당선한 장석의 시, 문학청년이던 김창희가 쓴 시, 최만섭의 수필 등 친구들의 글이 실린 신문을 간직하고 있다가 연말모임 같은 곳에서 액자에 넣어 선물하기도 했다. 무엇이든 소중히 기억하고 오래 간직하지 않으면 실행하기 불가능한 일이다. 모전자전母傳子傳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고양시에 테라코타를 굽고 있는 도예가 한애규도 노회찬의 수십년 지우. 막주그룹(매달 마지막주 함께 산에 가거나, 아무 술이나 마시면 좋은 노회찬 지인들의 오랜 모임 이름)의 일원으로 종종 이 집에서 만나 근황을 나누곤 했다고 한다. 그가 들려주는 회고담은 밤늦은 감자탕집의 이야기 울타리를 벗어난다. “매번 똑같은 감자탕집 말고 우리도 남들처럼 홍대앞으로 가자며 간 곳이 올드락이란 노땅클럽이었지. 다들 취해서 클럽 안 에어컨을 껴안고 춤을 추는 난리브루스가 벌어졌지. 장석씬가 누군가는 신나서 소리쳤고. ‘다신 산에 안갈래, 여기만 올래!’” 2000년대 초엽의 에피소드라고 한다. 2004년에 나온 <우리시대 진보의 파수꾼 노회찬>을 다시 인용하면, 인터뷰어 정운영이 노회찬에게 “노래와 춤실력도 상당하다던데 사실인가?”라고 추궁하고, 인터뷰이 노회찬은 “유언비어입니다”라고 단칼에 부인하다.
그렇게 감자탕집을 나와 일행이 발길닿는대로 들어선 2차가 카페 ‘서촌브루스’. 주인장이 함께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종종 들리시곤 했다”는, 근황아닌 근황을 전한다. 몇순배의 술이 돌고 이미 깊을대로 깊은 밤거리로 나서니, 사실이든 아니든 그때 그 난리부르스의 주인공이 꼭 노회찬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