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단 소식
[민들레(59호)] <노회찬 평전> 독자서평 '6411번 버스 연설'로 여전히 살아 숨 쉬는 진보 정치인
<노회찬 평전> 독자서평
'6411번 버스 연설'로 여전히 살아 숨 쉬는 진보 정치인
2024년 1월 중순, 내가 대표로 있는 '좋은기사연구모임'에서 장편 소설 <범도>의 작가 방현석씨를 초청해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지난해 세상을 확 뒤집어 놨던 '육사의 홍범도 장군 흉상 들어내기 책동'이 방 작가를 초청하는 동기가 됐다. 7백 쪽이 넘는 소설을 쓴 그야말로 홍 장군을 가장 잘 알고 평가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가 이 소설을 집필하고 펴낸 시기가 흉상 들어내기 움직임이 벌어지기 훨씬 이전이었다. 그래서 그의 홍 장군에 대한 평가는 최근의 이념 논란에서 벗어나 더욱 객관적일 터였다.
소설 <범도>는 일본제국주의 시대 무장독립운동의 대표적인 사건인 봉오동 전투의 주역 홍범도 장군을 비롯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역정을 담은 대작이다. 작가는 소설에서 홍 장군만을 영웅적으로 부각하지 않고 당대에 그와 관계를 맺으며 살던 수많은 사람들이 조선에서 일제 식민지로 넘어가는 시대 변화 속에서 어떻게 대응하고 변해가는지, 배반하고 싸웠는지를 두루 담았다. 따라서 이 소설의 성격을 굳이 분류한다면 영웅담이 아니라 홍 장군의 이름을 빌린 민중 소설, 역사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방 작가의 강연이 끝난 뒤 회원들과 짧은 대화가 있었다. 그때 한 회원이 방 작가에게 물었다. 소설가로서 한국의 기자와 저널리즘을 어떻게 평가하느냐고. 방 작가는 질문에 직접 답변하지 않고 에둘러 말했다. "외국에 나가 서점에 가보면 픽션 못지않게 논픽션 출판물이 많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그런 점이 많이 부족한 것 같다. 논픽션은 기자들이 제일 잘하는 분야 아니냐"라고 답변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도 최근 훌륭한 논픽션이 나왔다면서 <노회찬 평전>(사회평론아카데미, 이광호 지음, 2023년 6월)을 거명했다. 그 책을 쓴 사람이 기자 출신으로 알고 있다면서 말이다.
이에 앞서 지난해 12월 말에 열린 '2023 언론단체 합동송년회'에서 이 책의 저자인 이광호씨(도서출판 레디앙 대표)가, 이 책을 쓴 것을 평가받아 '2023 제7회 자유언론실천상 특별상'을 받았다. 나도 그날 행사에 참석해 이씨가 상을 받고 수상소감을 말하는 걸 들었다. 소감 중에서 "성실한 기록자로서의 기자의 중요성이 새삼 강조되는 시대, 그것이 부재하여 더욱 필요한 시대에, 이번 제게 주신 상은, 탁월성과는 거리가 한참 멀지만 열심히 성실하게 기록하려는 노력의 가상함에 대한 격려라고 생각한다"라는 대목이 유독 귀에 들어왔다. 평전 작업을 하는 데 다른 일을 다 제쳐놓고 올곧이 4년 가까이를 매달렸다는 대목도 인상적이었다.
이 책은, 짧은 시기 안에 이런 두 가지 일을 겪으면서 읽게 됐다. 이 책은 진보 정치인 노회찬(1956~2018)이 숨진 뒤, 그를 기리기 위해 만든 노회찬재단이 그의 말과 글, 행적을 모아 놓은 '노회찬 아카이브'에 더해 저자인 이씨가 그의 가족, 동지, 친구의 기억을 살려 방대한 원고를 정리했다. 그렇게 정리한 쪽수가 600페이지다.
노회찬평전기획위원회에 따르면, 이 책의 성격은 평전을 지향했으나 비교적 기록에 충실한 평전과 전기의 중간쯤 된다. 저자는 책을 쓰면서 "노회찬은 한마디로 말하면 어떤 사람이야?"라는 물음에 답할 의무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털어놨다.
"노회찬은 대한민국에 명실상부한 대중적 진보 정당을 '만들고' 진보 정치 시대를 대중적으로 '열어간' 대표 정치인이었고, 진보 정당의 집권으로 세상을 바꾸기 위해 자신의 온 삶을, 영혼까지 바친 '우직한' 정치인"이라는 게 바로 그 질문에 대한 작가의 답이다.
책은 프롤로그(새로운 정치언어의 탄생)과 에필로그('백척간두'에서 내디딘 한 걸음)를 포함해, 시기 순으로 1장부터 11장까지로 구성돼 있다.
에필로그에서는 대중에게 정치인 노회찬을 각인시킨 2004년 3월 20일 노무현 대통령 탄핵 시기에 열렸던 <한국방송>의 심야토론 장면이 나온다. 그때 노회찬은 "우리 국민들도 50년 동안 썩은 판을 갈아야 합니다. 50년 동안 똑같은 판에다 삼겹살 구워 먹으면 고기가 시커메집니다. 판을 갈 때가 됐습니다"라는 촌철살인의 비유를 내뱉는다. 이때부터 노회찬은 대중적으로 말 잘하는 정치인의 대명사로 떠올랐다. 단지 말만 잘하는 것이 아니라 진보 정치가 왜 필요한지도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책을 읽어보면, 노회찬의 촌철살인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노력의 산물임을 알 수 있다. 부단한 독서와 사색의 결과다. 이런 노력이 그를 가장 유머와 위트를 갖춘 정치인으로 만들었다. 거칠고 난삽한 언어가 판을 치는 정치판에서 노회찬의 신선하고 정곡을 찌르는, 그것도 유머와 위트를 장착한 언어는 하나의 사건이라고 할 만하다. 상대를 화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웃기면서 굴복하게 만드는 비판의 언어 부족이 한국 정치인의 가장 큰 결점이라면, 지금이라도 큰 지도자를 꿈꾸는 정치인들은 그가 남긴 말을 꼼꼼하게 연구하고 배울 필요가 있을 것이다.
나는 6백 쪽이나 되는 이 책 중에서 기억해야 할 하나만 골라야 한다면, 제9장('정치적 사형' 그리고 부활)에 나오는 진보정의당 출범과 6411 버스 연설을 주저 없이 꼽겠다. 이 연설은 그가 2012년 10월 진보정의당 대표를 맡으면서 한 수락연설이다. 6411 버스 연설에 관해서 그런 유명한 연설이 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직접 전문을 읽은 것이 여기서 처음이다. 이 연설은 노회찬이 진보 정치를 하는 이유, 정치인으로 존재하는 이유가 올곧이 담긴 연설이다.
새벽 4시와 4시 5분쯤 구로구 가로수공원을 출발해 강남 개포동 주공 2단지까지 운행하는 버스의 풍경을 얘기하며 정치의 역할이 무엇인지 담담하게 밝힌 연설이다. 그 버스에는 강남의 빌딩으로 청소를 하러 가는 미화원이 가득 타고 간다. 하지만 그 시간이 지나면 당시 어떤 사람들이 탔는지 아무도 모른다. 바로 그들은 '투명 인간'이고 투명인간 취급을 받는다. 정당도 그들이 필요로 할 때 외칠 때 전혀 반응하지 않는 투명 정당이라는 게 노회찬의 인식이다. 즉, 미화원, 비정규직, 해고 노동자, 철거민 등 우리 사회의 밑바닥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로 있는 '투명 인간'에게 다가서고 도움을 줄 수 있는 정당이 돼야 한다는 게 그의 연설 요지다.
이 연설을 여기에 다 옮기지 못하는 게 아쉽지만, 꼭 찾아서 읽어보기 바란다. 내가 보기에는 노회찬의 사람됨, 사상, 정치관을 가장 잘 압축해 놓은 연설이다. 한국의 정치사에서 가장 빛나는 연설임에 틀림없다.
나는 에필로그를 읽으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감정이 매우 둔한 사람이지만, 그가 자신의 목숨을 끊을 때까지 고뇌에 고뇌를 거듭했을 심정이 어땠을까 상상하며 눈가가 촉촉해졌다.
평전의 마지막에 이씨는 그의 죽음을 이렇게 묘사하며 평가했다.
"마지막 선택의 순간은 그의 존재가 흔들린 시간이었다. 낮은 곳으로 내려가 그곳에 있는 사람들의 편에 서서 세상을 바꾸는 일을 자기의 소명으로 기꺼이 받아들였고, 그 일을 좋아했고, 잘했던 그가, 그것이 삶의 의미였던 그가, 더 이상 그 일을 하기 힘들어졌다고 판단했을 때, 흔들리지 않는 원칙 아래 내린 마지막 선택이 이 책을 세상에 태어나게 했다."
이 책에는 노회찬이 관여한 노동운동과 진보 정당 운동의 이면사도 풍부하게 나온다. 그의 80%를 키워준 학창 시절도 빼놓을 수 없는 대목이다. 책은 두껍지만, 소설처럼 술술 읽힌다. 굳이 방현석 작가의 평가를 빌리지 않더라도, 최근에 나온 논픽션 중에서 압권이다.
4월 10일 실시되는 제22대 총선이 바로 코앞에 다가왔다. 안타깝게도 지금의 선거판에서 노회찬이 몸과 마음을 바쳐 추구했던 진보 정치와 진보 정당은 존재감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남긴 '6411번 버스 연설'의 의미마저 사라진 것은 아니다. 6411번 버스 연설은 여전히 한국의 진보 정치, 아니 한국의 '좋은 정치'가 출발하고 지향해야 할 지점을 가리키고 있다.
오태규
전 오사카총영사관에서 총영사
전 한겨레신문사에서 논설위원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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