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단 소식
[민들레(59호)] ‘노회찬의 서재’에서 ‘노회찬의 집’으로 나아가는 꿈
(편집자 주) 노회찬재단은 내년 2월, 현재 공덕 사무실의 계약 만료를 앞두고 있습니다. 노회찬 의원실부터 재단 준비위를 거쳐, 현재는 재단의 운영을 맡고있는 박규님 운영실장의 글을 통해 노회찬재단이 거쳐온, 머물고 있는, 나아갈 공간에 대한 기억과 바람을 나누어 봅니다.
약자들의 벗, 노회찬이 우리에게 선물한 재단
‘노회찬의 서재’에서 ‘노회찬의 집’으로 나아가는 꿈
박규님 노회찬재단 운영실장
1.
“ ‘노회찬의 서재, 봄’...그가 멈춘 곳에서 출범한 노회찬재단 기록관 이름이다. 언 땅을 뚫고 달려오는 생동하는 ‘봄’을 너무나 좋아했던 사람. 단 한순간도 손에서 책을 놓아 본적이 없었던 독서광. 그의 국회의원회관 510호 마지막 책상 위엔 그리스인 조르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82년생 김지영, 재미있는 발명발견 이야기, 원색 자연학습도감, 시이튼의 동물기, 장길산, 학생애창450곡집, 경기고1-3반 교지 2권과 어릴적 친구들의 기사가 실린 신문스크랩북 ...등등이 놓여 있었다.
노회찬에게 가장 영향을 끼쳤을 이 책들도 있는 서재. 야트막한 동네에 둥지를 틀고 있으면 새들도 날아오고 봄바람이 꽃씨도 몰고와 어깨동무하며 마을을 이룰 것이다. 6411 버스에 타고 있는 노회찬이 사랑했던 낮은 곳의 벗들과 그들의 자자손손 밥이 되고 술이 되어줄 재단엔 정원의 화초로 잘 ‘길러진’ 모범생 노회찬도 있고, 유신을 겪으며 “전쟁을 겪은 소년은 더 이상 소년이 아니다.” 라고 스스로를 규정했던 전환기의 노회찬도 있다. 노회찬의 처음과 끝이 있고 노회찬이 꿈꾸었던 세상과 우리가 가꾸어야 할 미래가 있다.” - <음식천국 노회찬> 이인우 作, 2021.3. 일빛출판사, 여는 글 중 -
2019년 6월부터 1년 9개월 동안 재단소식지 ‘민들레’와 ‘프레시안’에 연재되었던 글을 단행본 <음식천국 노회찬>으로 묶었을 때, 내가 여는글 “산하에 봄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립니다”에 게재했던 글의 일부분이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고 흘러 이제 6주기를 눈앞에 두고 있다. 재단은 또 하나의 꿈을 준비하고 있다. ‘6411 노회찬정신’을 올곧게 실현할 수 있는 집을 만드는 꿈이다. 공덕동 자그마한 기록관에 가둬뒀던 노회찬을 모두의 노회찬으로, 시민의 노회찬으로 세상에 풀어 놓는 일이다. ‘상시 전시실’도 있는 ‘노회찬의 집’을 만들어 ‘누구나’ 편하게 드나드는 문턱이 없는 소박한 ‘노회찬의 집’을 만들어 그 공간에서 우리는 그가 꾸었던 세상을 함께 만들어가는 꿈을 꾸고 있다.
2.
국회의원회관 712호(17대, 2004.5) -> 18대선거사무소(상계동, 2008.1) -> 노회찬마들연구소(상계동, 2008.5) -> 국회의원회관 518호(19대, 2012.5) ->노회찬마들연구소(상계동, 2013.2) -> 20대선거사무소(창원, 2016.2) -> 국회의원회관 510호(20대, 2016.5~2018.7.23.) -> 컨테이너물류창고(김포, 2018.8) -> 노회찬재단준비위(마포 성우빌딩501호, 2018.9) -> 노회찬재단(공덕 롯데캐슬프레지던트101동1501호, 2019.8)
그리고... 계약 만료를 앞둔 내년 2025년 2월엔 ‘어디로 가야 하나... ’
2018년 7월 23일 그 무덥던 날 노회찬이 멈추고, 2004년부터 이리저리 옮겨 다녔던 책과 서류 등의 물품이 어느 날 갑자기 농담처럼 유품이 되어버린 ‘국회의원회관 510호’의 적지 않은 짐을 쌌다. ‘어디로 가야 하나,..’ 2018년 8월, 김포에 있는 컨테이너 이삿짐 보관창고로 짐을 옮겼다.
유품이 무사한지 수시로 김포에 있는 컨테이너창고를 찾았다. 며칠 지나지 않았는데도 벌써 책과 서류에 곰팡이가 내려 앉기 시작했다. 감사하게도 그 무렵 통인도시연구소, 요양보호사협회 등등 재단추진위 회의공간을 내 주겠다고 선뜻 선의를 보여주는 곳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회의실보다는 책과 서류를 제대로 꽂아 놓을 수 있는 바람 통하는 공간이 더 절실했다. 장례식장에서부터 이미 논의되기 시작했던 재단추진위원회 회의를 통해 마들연구소 기금으로 사무실을 물색하기로 했다.
그 정신없는 와중에도 장애접근권이 가능한지가 사무실 선택의 최우선 조건이었다. 휠체어를 타고 들어갈 수 있는 10인승 이상의 엘리베이터, 휠체어를 타고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책과 유품이 겨우 들어갈 수 있는 29평의 좁은 마포 성우빌딩 501호로 한 달 만에 짐을 옮겼다. 사무총장, 사업실장, 운영실장의 단촐한 상근체계를 꾸리고 노회찬재단준비위원회의 시간을 열었다. 사무실을 1년 단기로 계약 한 것은 노회찬을 생환(生還)해 내기 위한 공익재단을 당해연도 안에 반드시 만들겠다는 12명 추진위원들(김윤철, 김종철, 박갑주, 박규님, 박창규, 박치웅, 신장식, 윤영상, 이종석, 임영탁, 조승수, 조현연)의 각오와 소망의 표현이기도 했다.
2018년 12월 그 해를 넘기지 않고 정말로 재단이 만들어졌다. 노회찬의 유지를 이어가자고 뜻을 모은 발기인 3천여 명과 12억 원의 설립기금을 모아 국회사무처를 주무관청으로 하는 공익재단법인 <평등하고 공정한나라 노회찬재단>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렇게 ‘약자들의 벗’ 노회찬은 수많은 약자들과 함께 같은 꿈을 꿀 수 있는 재단을 우리에게 선물했다.
3.
공익재단으로서 기본사업을 펼치기 위한 최소한의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 과제로 대두되었다. 건물주가 된다는 것은 노회찬의 삶과 배치된다고 그 누구도 강하게 주장하지 않았음에도 당시 재단은 대출을 일으켜 건물을 매입할 생각에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정치학교를 운영할 교육 공간과 아카이브 공간, 그리고 사무 공간이 있는 보증금 얼마에 얼마의 월세를 내는 딱 그 정도의 50평 이상 되는 규모만을 염두에 두고 다시 공간답사에 나섰다.
장애접근성이 용이해야 한다는 기본조건 외에도 이제는 회원과 시민이 쉽게 드나들 수 있는 대중교통 요지여야 한다는 조건 하나가 더 추가되었다. 지하철에서 도보 10분 내외에 도착할 수 있고 장애접근성이 담보된 곳은 큰 빌딩 내에 있는 사무실 외에는 찾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런 곳의 관리비는 월세에 버금갈 정도로 높았다. 그러던 중 전세 13억에 나와 있는 교통요지의 오피스텔 공간을 발견했다는 한 조력자의 연락을 받았다. 사무실이 올 전세로 나와 있는 경우는 전무후무하고, 또 안타깝게도 (정치)재단이라는 이유로 몇 차례 계약 직전 단계에서 파기되었던 경험이 있던 재단으로서는 건물주가 심지어는 노회찬을 좋아하고 존경한다니!! 그런 점에서 일단 가산점을 주었다.
공덕역 2번 출구와 바로 연결되어있는 롯데캐슬프레지던트는 월세 걱정 없는 전세라는 장점 외에도 장애접근성 해결, 교통요지, 저렴한 관리비, 75평이라는 적절한 공간규모, 방문자 전원 5시간 무료주차, 입주자를 위한 다양한 편의시설과 쾌적한 환경... 등 많은 장점을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잠시 계약을 주저했던 이유는 '캐슬 프레지던트' 이라는 건물 이름과 화려한 외관에서 오는 중압감이 6411 투명인간과 함께 간다는 노회찬재단의 정체성과 맞느냐는 문제였다. 두 번째는 하나의 단지 안에 오피스텔, 호텔, 주거시설이 함께 존재하다보니 보안이 너무 철저해 입주자 외에는 출입이 불편하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일반적인 경우에는 장점이겠지만, '열린 공간'을 지향하고 있던 재단에게는 단점으로 다가오는 부분이었다.
이러한 두 개의 큰 단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회원들만의 회비로 운영해야 하는 재단으로서는 전세 계약을 통해 운영비 절감효과가 가장 큰 건물을 선택하기로 했다. "안정적인 회원구조를 갖출 때까지"라는 단서를 붙여 이사회의 의결을 거쳐 2019년 8월에 현재의 건물에 입주하여 5년여를 보내고 있다. 지내다 보니 여러 장점은 모두 사라지고 출입이 불편하다는 문제점만 가장 크게 각인되기도 했다. 그러나 재단 프로그램에 참석했던 분들 가운데는 “재단이 아니었다면 언감생심 우리 같은 사람이 이런 쾌적한 곳에 와 볼 수 있었겠냐”며 ‘노회찬이 시민에 준 선물’이라고까지 감사해 한 분도 적지 않았다. 재단은 그렇게 장단점이 분명한 조건에서도 노회찬정치학교, 비전만들기사업, 아카이브사업, 인문예술문화사업 등 6411 투명노동자를 위한 다양한 사업을 실험했고 안착시켜가는 단계로 접어들었다. 그 사이사이 영화도 만들고, 음반도 내고, 연극도 만들고, 노회찬평전도 내는 굵직한 사업을 수행했다.
노회찬을 존경하고 그리워하는 다양한 분들이 ‘함께 비를 맞고자’재단 회원으로 모였다. 노회찬이 떠난 후에야 비로소 노회찬의 진심을 알게 되었다며 안타까운 마음에 달려왔다는 고마운 분들 또한 점점 늘어나고 있다. 회원 여러분과 함께 재단이 여기까지 성장해 왔듯이 소박하게나마 ‘노회찬을 닮은 집’을 짓고 만들어 가는 일도 회원 여러분과 함께 힘 모아 가고자 한다. 노회찬이 없는 세상에서도 노회찬을 대하듯 재단을 아끼고 믿어준 여러분들이 재단회원이라는 자부심을 품을 수 있도록 다시 한 번 신발끈을 묶는다.
4.
노회찬은 진보정치가로, 3선(17,19,20대) 국회의원으로 생을 마감하는 그날까지 사회 약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그들의 바람을 실천하는 의정활동을 열정적으로 펼쳤다. 노회찬의 좌우명은 ‘함께 맞는 비’였고, 노회찬이 꿈꾼 세상은 “모든 시민이 악기 하나쯤은 연주할 수 있는 나라”였다. 언젠가 ‘직업을 바꾼다면?’이란 질문을 받았을 때, 노회찬은 ‘요리사와 작곡가’를 꼽았다. “늘 새로운 것을 만들어 많은 사람들을 기쁘게 할 수 있어서”라면서.
6411번 첫 버스에 탄 ‘투명인간들’이 있는 곳이 그의 두 발과 두 팔이 머물러 있던 자리였다. 국민 속에서 시민들과 함께 늘 낮게 살고자 했던 그는 좌나 우를 떠나 모두에게 참 좋은 정치인이었다. 평생을 한 자리에 서 있었던 그는 스스로 한 권의 교과서로 이제 우리 옆에 남았다.
그런 ‘노회찬을 닮은 집’을 ‘노회찬을 닮은 사람들’과 함께 만들고 싶다. 모든 혐오와 차별로부터 안전한 공간, 장애 여부와 관련 없이, 이념적 차이와 상관없이, 재단 건물이 마치 ‘나를 위해서 만들어진 집’이라는 느낌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는 공간, 재단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늘 환대받는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공간, 평등하고 공정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고자 꿈꾸는 문턱 낮은 모두의 집. 그런 집을 갖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