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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 소식

[민들레(61호)] 6주기 후기 (추모제1) 노회찬 추모식 가던 날

재단활동 2024. 08. 05





노회찬 추모식 가던 날
- 황광우 (작가)


오늘은 모란 공원에 가는 날이다.
새벽부터 일어나 부산을 떨었다.

“무리하는 거 아니예요?”

부인의 걱정스런 충고를 뒤로 하고 나는 집을 나섰다. 
서울역 오른 쪽 화장실에서 만나자는 것이
조승수 동지가 전한 접선 명령이었다. 
이 접선에 실패하면 나는 끈 떨어진 연(鳶)이 된다. 

지난번에도 서울역 앞에서 약속 장소를 찾지 못해
한 시간을 헤매지 않았던가? 
노 폰의 삶은 갈수록 나를 힘들게 한다. 

차는 서울역에 도착하였다.
다행히 검은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있는 조를 발견했다.
비도 내리지 않았고, 오늘은 일이 잘 풀리려나 보다.
조금 있으니 정광필 동지가 차를 몰고 왔다.

“감자, 무지 좋았어.”

늘 사태를 낙관하는 게 광필의 품격이지만
조가 재배한 감자의 품평은 유달리 호들갑스러웠다. 

나는 조에게 물었다.

“감자, 남은 거 있어?”
“예, 조금 남아 있어요.”
“그럼 광주로 좀 부쳐줘.”

나는 지인들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감자를 주문하였다.

차는 마석에 가까이 왔다.
청량리에서 열차를 타고 강촌과 대성리를 가던 시절이 언제였던가?
김병렬 형이 애창하던 <제비>가 다시 들리는 듯하였고,
권호영 형이 애창하던 <예성강>이 귓가에 들리는 듯하였다. 

추모식 입구엔 반가운 얼굴들이 서 있었다. 
민주노동당 때 함께 활동하던 젊은 후배들....
후배들은 하나도 늙지 않았는데, 나만 백발이 되었는가.
노회찬의 묘 앞에 서니 울컥 눈물이 나왔다. 

미망인이 인사말을 하였다. 
지선이 누나를 만난 게 1984년 동인천역 앞 포장마차였다.
새벽까지 술을 마셨다. 
그 날 지선이 누나는 노동운동을 하기 위해
결혼을 포기해야 하는 자신의 고뇌를 말하였다.
이총각 언니처럼 말이다. 

조 이사장이 보고를 하였다. 
1986년 5.3 인천항쟁 직후 나는 몹시 힘든 시기를 보내야했다. 
수배자의 신분으로 나는 조랑 혁명이론을 학습하였다.
부천에 소재한 어느 골방에서 
학습을 마치고 우리는 지리산 종주 등정을 계획하였다. 
여행을 떠나는 날 아침, 경찰은 자취방을 덮쳤다. 
우연히도 나는 그날 아침 인근에 있던 신보연의 집에서 자고 있었다.  
조는 <항일무장투쟁사>를 소지하였고, 부천경찰서에 연행되었고,
국가보안법에 저촉되어 감옥에서 썩었다. 

권영길 대표가 연설을 하였다.
말이 약간은 어눌하였으나 건강은 씩씩해보였다. 
2000년 민주노동당을 창당하던 날의 감격이 떠올랐다.
“어쩌다 민주노동당이 몰락했을까?”
지금도 나를 괴롭히는 물음이다.
일전에 권영길 대표에게 나는 민주노동당의 몰락에 대한
평가를 조직해야 한다고 제안한 적이 있었다.

묘역은 공동묘지여서 그런 것인지 비좁았다.
뫼뚱마다 풀이 무성하였다. 

혁명가를 그리워하는 추모는 이제 접고
혁명운동의 부활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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