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단 소식
[민들레(67호)] 노회찬정치학교 <응원봉, 광주를 만나다! 5.18답사 교실> 후기
기획자 후기
앞서서 나간 이들을 따랐습니다.
- 노회찬재단 교육부장 이종민
12.3 불법 비상 계엄을 막아낸 시민, 부당한 명령을 거부한 군인, 이들의 정의로운 행동은 상식이었습니다. 불의에 항거하게 한 상식은 대한민국은 공화국이고, 모든 권력은 시민 개개인으로부터 나온다는 상식이었습니다. 그 상식이 국가와 개인을 구별하려 하지 않고, 권력이 곧 자신이라는 착각에 빠진 전근대적 대통령과 그 추종자들이 행한 몰상식과 불의를 막아냈습니다.
정의로운 행동과 상식.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닐 것입니다. 모두가 무엇을 기억하고 있기에 위기의 순간에 상식이 행동으로 이어져 불의를 막아낸 것입니다. 그 기억은 1980년 5월 18일부터의 열흘의 광주였습니다. 그날의 광주 이후, 다시는 광주의 비극이 없게 하려는 민주주의의 노력이 상식이 된 세상, 그 세상에서 태어나 살아온 오늘의 세대가 12월 3일 여의도에서 불의를 막아냈습니다. 12월 21일 남태령에서 정의를 향한 외침에 연대하고 공명했습니다. 응원봉의 불빛이 물결이 되었습니다.
지난 2월 15일부터 16일 노회찬정치학교 <응원봉, 광주를 만나다 5.18 답사>는 현재를 도운 과거에 대한 응답이었습니다. 희생과 용기에 대한 감사함이기도 했으며, 과거의 외침에 연대하려는 발걸음이었습니다. 노회찬에게 광주는 어떤 의미였을까? 그리고 노회찬정치학교의 광주는 어디를 향하며, 누구를 쫓으며, 무엇을 담을 것인가? 이 고민을 풀어내는 것이 노회찬으로 모인 이들과 함께하는 의미있는 여정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광주로 향하는 길. 광주가 가까워 질수록 불안함과 우려, 분노가 커져갔습니다. 탄핵 반대 집회 참석자를 태운 수십대의 버스를 목격하며 도착한 금남로. 내란 수괴를 옹호하고, 불법 계엄을 지지하는 발언이 마치 시민을 향해 거침없이 쏘아대던 계엄군의 총탄처럼 느껴졌습니다. 성조기와 이스라엘 기를 휘날리는 내란 지지자들이 5.18 광주 항쟁 옛터에 멈춰선 우리에게 쏟아낸 지역비하, 혐중 선동, 가짜 뉴스는 계엄군의 진압봉 같았습니다. 그렇게 24년 12월의 응원봉은 80년 5월의 광주를 만났습니다.
답사를 함께 한 5학년 여학생이 던진 질문은 친구의 죽음에 분노한 고등학생 시민군의 용기가 남긴 흔적이었습니다. 평생을 여성 농민 운동에 헌신한 한 활동가가 사적지 어딘 가에 멈춰선 발걸음은 광주에서 피 흘린 여성의 투쟁이 있었습니다. 어느 한 여성 노동자의 눈시울을 뜨겁게 한 노동자와 함께하던 들불야학 열사의 죽음은 광주가 어떤 민주주의를 위해 피 흘렸는가를 다시 깨닫게 했습니다. 5.18 시민군과 마주한 저녁, “아직도 아픕니다” 무겁게 뗀 한마디와 눈물은 그날의 광주, 그 광주를 지우려던 부당한 권력의 폭력, 아픔을 외면하고 왜곡하는 비겁함으로 사라지지 않은 우리 현대사의 어두움이 짙게 느껴졌습니다.
24년 12월의 시민과 함께 만난 5월의 광주는 소수의 영웅담이 아닌, 계엄군의 잔학함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배움의 길고 짧음, 가진 것의 많고 적음, 노동과 직업의 귀천과 무관한 민주주의를 짓밟으려는 폭력과 불의에 저항한 광주의 항쟁은 주연과 조연이 나눠져 있지 않았습니다. 일터의 땀을 소중히 하고, 하루의 피로를 가족과 친구와 이웃과 풀며, 내일의 일상을 준비하는 보통 사람들의 분노였고, 용기였고, 연대였으며, 서로가 서로에 대한 보살핌이었습니다. 서로가 함께 비를 맞던 현장이었습니다.
돌아오는 버스 안, 답사를 함께한 여행 동지들을 다시 보았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온 아들, 아빠와 함께 온 학생, 친구와 함께 온 중년의 회사원, 선생님 그리고 선생님을 준비하는 학생, 언니와 함께 온 동생, 울산에서 함께 온 부부, 제주에서 올라온 농민 활동가, 안무가, 일상의 노동을 하는 직장인. 광주를 찾은 우리의 모습이 우리가 만난 광주의 모습이었습니다. 5월의 광주, 앞서서 나가니 산 자가 따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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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강생후기
시계탑이 1980년의 횃불부터
2025년의 응원봉까지 지켜보고 있다
- 허ㅇㅇ 님
‘광주로 가야겠다!’라고 생각한 건 꽤 오래전 일이었습니다. 궁색하게도 시간과 거리가 너무 많이 소요된다는 게 실천으로 옮기는데 쉽지 않았어요. 때마침 노회찬재단의 정치학교 홍보 포스터를 보았습니다. 상세한 개요를 보는데 1박2일이라는 짧은 시간에 5.18민주화운동의 역사적 현장을 상세한 설명과 느낄 수 있다는 것에 이끌려 동생과 함께 참여했어요. 동생이야말로 이번 집회 현장에서 저와 가장 가깝게 참여하는 동지였어요. 동생도 흔쾌히 동의해서 저희 자매는 광주로 떠났습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 하던가요, 민주주의 수호의 선봉에 섰던 광주의 금남로에 내란을 옹호하고 선동하는 집회가 열려 첫 일정에 차질이 생겼습니다. 사실 그때부터 저의 마음이 1980년, 그 시절의 광주로 감정이입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참 모순적이죠. 사실과 다르게 퍼져간 내용에 얼마나 외롭고, 억울하고, 슬펐을까. 차마 다 표현하지 못할 마음을 느끼게 됐어요. 평생 북한과는 거리가 멀었을, 온갖 비난과 오해로 평생을 살게 될 줄은 몰랐을, 광주와 전라도를 생각하게 됐어요. 그 당시 민주항쟁을 이끌던 중심에 ‘들불야학’이 있었고, 그 정신을 이어받은 ‘들불지기’ 선생님들의 생생한 설명을 들을 때마다 실은 가슴 한구석이 무너져 내리는 느낌을 받았어요. 왜 우리는 광주를, 전라도를 그렇게나 외면하고 살았을까, 같은 대한민국이라는 국적을 가진 곳에서 민간인을, 시민을 이렇게나 학살해도 진상규명과 주동자 처벌이 이렇게나 어려운 일인 걸까. 제 머릿속에서는 뒤엉킨 생각들이 때마침 벌어진 ‘12.3 내란’의 상황과 계속해서 겹쳤습니다.
‘시계탑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사진으로만 보던 광장을 실제로 마주 보고 있다는 게 믿기 어려울 정도를 피부로 와닿는 광주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광주의 변화 속에 함께한 시계탑이 1980년의 횃불부터 2025년의 응원봉까지 지켜보고 있는 것이, 마치 동학농민운동 백성들의 항쟁부터 지금의 탄핵 집회를 바라보는 광화문과 같은 역할을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현재 우리의 손에 든 게 단지 빛나는 응원봉이 될 수 있었던 것은, 1980년의 광주와 전라도 전체가 화염병과 총기를 들고 지켜낸 민주주의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더욱이 5·18민주항쟁을 기억하고 왜곡하는 것들로부터 지켜내야겠다고 다짐합니다.
뜻깊은 역사 현장을 노회찬재단의 정치학교에서 만난 분들과 함께할 수 있어서 더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답사의 매 순간에 함께하며 평소에 정치를 바라보는 생각과 고민을 나눌 수 있어 좋았습니다. 다소 민감한 질문이더라도 꼭 해야만 하는 이야기들을 이성적으로 바라볼 기회의 장이 되었다는 것도 제게 기쁨이었습니다. 따뜻한 환대로 맞이해주신 노회찬재단의 선생님들께도 큰 감사를 드리고 싶어요. 저의 광주에 대한 첫 기억을 의미 있는 시간으로 가득 채울 수 있어서 진정으로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5·18 민주항쟁의 정신과 노회찬 의원의 연대를 기억하며 살아가는 시민으로 살아가기를 다짐합니다.
광주를 다녀와서
이병현 님
긴 설명이 필요없는 민주화의 성지, 광주를 다녀왔습니다.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까운 거리에 있는 광주. 선뜻 시간을 내어 다녀오기 쉽지 않은데 노회찬 재단에서 밀도있는 답사 일정을 마련해주어 감사했습니다.
전일빌딩에서 국립 518묘지까지 이어지는 흐름 속에서 나를 성찰해보고 삶의 방향성에 대한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해 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 속에 깊이 숨겨져 있던 내용들, 지금도 살아 숨쉬는 뜨거운 정신을 새롭게 만날 수 있었습니다.
민중들과 함께 호흡하며 공부했던 들불야학의 존재와 불꽃같은 윤상원 열사의 삶 등 나누고 싶은 이야기들이 있지만, 가장 인상 깊었던 한 부분에 대해서만 제 생각을 나눌까 합니다. 그것은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시민군이셨던 분들과의 대화였습니다. 물리적인 시간은 짧았지만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여운과 울림이 있었습니다.
무엇이 그 몇 마디 말에 그토록 큰 울림을 주는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입으로 민주주의를 말하지만 실제 삶에서는 반대로 사는 것, 인권을 말하면서 민주주의 파괴 행위에 무관심하거나 침묵하는 것, 장황한 텍스트만으로는 결코 생명력 있는 울림을 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생각한 것처럼 살아내는 삶의 실천이 있을 때 말에 힘이 생깁니다. 짧은 말에도, 그리고 침묵에도 힘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시민군이셨던 할아버지의 짧은 몇 마디의 말과 침묵을 통해 저의 삶을 돌아보게 됩니다. 말로는 정의를 이야기하지만 실제 삶에서는 이익을 계산하며, 불의한 구조가 거대해서 어쩔 수 없다고, 타협하고 외면하는 모습은 없는지 반성하게 됩니다. 겸허히 스스로를 돌아보고, 내가 있는 삶의 자리에서 떳떳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나갈 것인가를 돌아보게 하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오가는 일정을 세심하게 조율해주신 재단분들, 1박 2일동안 서로를 이해하려는 태도와 작은 부분까지 배려하는 따뜻함을 통해 민주적인 문화에 대해 깨우침을 주신 동지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80년 광주 민주화 정신이
계속 이어지고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 이우정 님
광주를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습니다. 가게 된다면 5.18 사적지들을 꼭 둘러보고 싶었습니다. 적절한 기회를 못 잡고 있던 차, 노회찬정치학교에서 알맞은 답사 프로그램이 있는 것을 알게 돼 참여하게 됐습니다.
‘응원봉, 광주를 만나다’라는 타이틀답게 꾸준히 집회에 참석하고 계신 분들도 많이 만날 수 있었습니다. 전일빌딩부터 5.18민주묘지까지 여러 사적지를 함께 방문할 수 있어 좋았습니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청년 세대의 들불지기들이었습니다. 5.18을 경험하지 않은 세대가 5.18에 관해 설명해 주는 것에 80년 광주 민주화 정신이 계속 이어지고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또 그때 그 시절을 겪었던 분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뜻깊었고, 트라우마에 아직도 힘겨워하시는 모습에 여전히 우리는 광주에 빚을 지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습니다. 일정을 진행하는 내내 삶에 진지하게 임하며 깊이 있게 생각하시는 분들과 다양한 의견을 공유할 수 있어 정말 유익했고 감사했습니다.
현장에서 봤던 잔혹한 5.18 당시 사진이 며칠 동안 눈을 감으면 떠올랐습니다. 제가 1박 2일 동안 접한 것은 단지 일부일 뿐이라는 사실에 앞으로도 광주를 비롯한 지난 아픈 역사에 대해 좀 더 관심을 갖고 주의 깊게 살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답사 당일 예상치 못하게 폐쇄돼 아쉽게 방문하지 못했던 5.18 민주화운동기록관을 포함해 광주를 꼭 다시 방문해 보고 싶어졌습니다. 이번을 계기로 인연을 맺게 된 시민분들과도 또 만나 뵐 수 있는 시간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추가로 하루 머물기에 부족함 없었던 숙소와 이틀간 맛의 고장 전라도의 솜씨가 담긴 식사도 만족스러웠습니다^^
민주주의는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며,
스스로 지키려는 사람들에 의해 유지된다는 것을
- 조현준 님
답사를 떠나며
나는 대학 시절 언론학을 전공하며 근현대사에서 언론 탄압의 역사를 배웠다. 5·18 민주화운동은 그중에서도 결코 빠질 수 없는 사건이었다. 공부를 하며 언젠가 한번쯤은 그 시절의 이야기를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어 광주를 찾았다. "거리에서 길을 물어보던 중 한 아주머니께서 내게 '서울에서 왔느냐'고 물으며 "광주에 왔으면 민주화운동의 흔적을 봐야 하지 않겠냐며 전남도청이 있는 쪽으로 꼭 가보라”고 하셨던 기억이 난다. 그때 광주를 찾았던 기억을 떠올리며, 이번에는 그때 미처 깊이 들여다보지 못했던 곳들을 온전히 느끼고 싶었다. 가슴 시린 역사의 한켠, 한 도시가 민주화의 상징이 되어버린 그날의 흔적을 직접 따라 걸어보고 싶었다.
총탄의 흔적을 간직한 전일빌딩
최후의 항전이 있었던 전남도청과 그 앞 매일 저녁 시민들이 횃불을 들고 모였던 동그란 분수대. 그리고 그 앞에는 1980년 당시 광주에서 가장 높은 빌딩이었던 전일빌딩이 있다. 그 건물에는 1980년 5월, 헬기에서 난사한 총탄 245개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 사실을 기억하기 위해서일까, 건물의 이름도 '전일빌딩 245'로 남아 있다. 건물 밖에서 보면 빨간색 동그라미로 총탄의 흔적을 표기해주고 있다. 건물의 10층 내부에서도 총탄의 흔적을 고스란히 볼 수 있었는데, 그때 당시 주변에 전일빌딩보다 높은 건물이 없었기에 헬기에서 사격을 했다는 것이 명징했다. 내부에는 이 내용에 관한 생생한 인터뷰와 사진, 영상자료, VR 체험까지 있어 그 날의 일들을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었다. 군부가 시민을 향해 총을 쏘았다는 사실을 직접 마주하니, 교과서나 다큐멘터리에서 보았던 역사가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했다. 그 흔적들이 당시의 공포와 비극을 여전히 증언하고 있었다.
이름을 찾지 못한 묘비들, 국립 5·18 민주묘지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는 참배를 해보기도 했다.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가사로만 듣던 임을 위한 행진곡에 맞춰 추모탑을 바라보고 한 발자국씩 걸어들어갈 때 느껴졌던 감정은 비장함 혹은 먹먹한 감정도 있었지만, 감사함이라는 마음이 컸던 것 같다. 국립 5·18 민주묘지에는 그날 민주화 운동에 참가하신 분들도 많지만, 평범한 일상을 보내다 돌아가신 분들도 많다. 한쪽에는 봉분이 없는 채로 비석만 채워진 자리들이 있다. 실종된 채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빈 자리라고 한다. 4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자리를 찾기 위해 노력한다고 했다. 그곳은 단순한 묘지가 아니라, 아직도 끝나지 않은 아픔의 공간이었다.
마지막까지 전남도청을 지켰던 그들, 시민군의 5월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은 시민들을 폭도로 몰아 무자비한 폭력을 가했다. 이에 맞서 싸운 사람들은 스스로를 ‘시민군’이라 칭하며 끝까지 항거했던 시민군들을 만나는 기회도 있었다. 5월 18일, 처음 계엄군이 광주에 발을 디딘 그날부터 최후의 항전이 있던 5월 27일 새벽까지, 시민군은 전남도청 등을 지키며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다. 당시 거리에서 싸웠던 이들은 청년 혹은 고등학생이었다. 그들은 이제 머리가 희끗한 중년이 되어 있었다. 세월이 흐른 지금, 누군가는 희생자들의 이야기를 책으로 남기고 강연을 하며 그날을 기억하려 했다. 반면, 어떤 이는 그날의 기억이 너무 아파 광주를 떠나 살았다. 방법은 달랐지만, 그날의 기억은 모두에게 깊은 트라우마로 남아 있었다. 시민군과의 만남이 마무리될 즈음, 그들에게 질문을 건넬 때마다 긴 대답을 하지 못했다. 말끝마다 멈칫하는 모습을 보며 코끝이 찡해져 계속해서 눈물을 삼켰다. 나는 단지 사실을 알고 있을 뿐인데도 이렇게 마음이 아픈데, 그날의 기억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얼마나 큰 고통일까. 그 아픔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5·18을 기억하며 나아가는 사람들
이번 답사는 광주에서 활동하는 청년 시민단체의 안내로 진행되었다. 이들은 직접 5·18을 겪은 세대는 아니었지만, 어릴 때부터 5·18을 일상 속에서 너무나도 깊이 배우며 자라왔다고 했다. 표어 그리기, 포스터 제작, 각종 교육과 행사 등을 통해 민주화운동의 정신을 자연스럽게 익혔다고 한다. 이번 답사의 소회를 묻는 질문에 나는 "광주에서 태어나고 자란 시민분들이 직접 안내해 주셔서 더욱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너무 재밌는 시간이었다"고 덧붙이며 아차 싶었다. ‘재미있다’는 표현이 단순한 즐거움을 의미하는 것처럼 들릴까 봐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러자 청년 단체 관계자는 오히려 호탕하게 웃으며 "5·18이 슬프고 아픈 기억으로만 남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라고 말했다. 그 말이 깊이 와닿았다. 그들은 과거의 상처를 잊지 않으면서도, 그 아픔을 힘으로 삼아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2024년, 그리고 다시 찾아온 민주주의의 위기
광주는 올해 많은 역사적 사건으로 주목받았다. 한강 작가가 5·18 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소설로 한국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고, 광주를 연고로 하는 프로야구팀 기아 타이거즈는 7년 만에 통합 우승을 차지했다. 많은 사람들이 "2024년은 광주의 해"라고 말할 정도로 기쁜 일들이 가득한 한해였다. 하지만 12월 3일, 47년 만에 다시 비상계엄이 선포되며 민주주의는 또다시 위기를 맞았다. 1980년을 기억하는 이들은 그날의 악몽을 떠올렸고, 나 역시 당연하게만 여겼던 민주주의가 한순간에 흔들릴 수 있음을 깨달았다.
답사를 마치며
1980년 5월 18일, 따뜻한 봄날의 일요일 오후. 광주의 거리는 평온했지만, 계엄군의 총과 몽둥이에 의해 그 평온함은 무너졌다. 그리고 44년이 지난 지금도, 그날의 상처는 여전히 남아 있다. 최근에 “광주에 민주주의를 빚졌다.” 라고 이야기 하는 사람들이 많다. 답사를 통해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민주주의는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며, 스스로 지키려는 사람들에 의해 유지된다는 것을. 1980년의 광주 시민들이 그러했듯이, 그리고 지금도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나는 이번 여정을 통해 얻은 깨달음을 오래도록 간직하며, 내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민주주의를 지켜 나가야겠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