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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 소식

[민들레(74호)] 나 같은 사람 이야기도 들을 게 있어요?

재단활동 2025. 09. 29




 

나 같은 사람 이야기도 들을 게 있어요? 
- 이수정 (구술생애사 1기, 재단 후원회원) 


오랫동안 해 오던 일을 그만두기 며칠 전이었다. 설렘 반 걱정 반으로 마음이 뒤숭숭하던 때, 구술생애사 강좌를 들어보라는 아는 언니의 전화 한 통을 받고 덜컥 수강신청을 했다. 사실 구술사는 들어보았어도 구술생애사는 낯선 단어라 재단에서 강의 시작 전에 읽으라고 한 <할배의 탄생>을 서둘러 구입했다. 책은 단숨에 읽었다. 구술생애사에 대한 이해가 생기기도 전이었지만 시작도 하기 전에 선택을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평소처럼 망설이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강의는 마치 수다 같았다. 일방적으로 쏟아내는 지식들이라기보다는 최현숙 선생님의 등 뒤에 숨겨진 커다란 보따리 속에서 하나씩 꺼내 놓는 꼬깃꼬깃한 쌈짓돈 같은 이야기였다. 강의 때마다 꺼내 놓는 이야기들과 그 이야기에 따라붙는 또 다른 이야기들을 따라 다니느라 도서관을 뒤져 구술생애사 관련 책들을 읽었고 그러다 보니 한 주 한 주가 너무 빠르게 흘러갔다. 

1기 후속 모임이 만들어졌고 구술생애사 작업을 하기 위해 구술자를 선정하고 섭외하는 과정이 시작되었다. 나는 강좌를 듣는 중에 이미 머릿 속에 떠오른 두 사람이 있었지만 갑작스런 나의 제안에 어떻게 반응할지 알 수 없어 제안하기를 한참 망설였다. 기한에 쫓겨 구술자의 일터에 찾아갔다. 이름도 전화번호도 모르는 상태라 무작정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연습까지 했건만 나의 설명이 부족했는지 구술자의 눈빛은 경계가 가득했다. 경계의 눈빛, 주룩주룩 내리던 비, 이야기 나누던 복도의 을씨년스런 분위기까지 더해져 거의 반쯤은 포기했던 것 같다. 처음엔 거절했지만 그래도 한 번 더 부탁을 드려보았고 ‘그런 건 하지 않는다’던 구술자는 한 달 정도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그 건물을 나서면서 나머지 반도 포기해야 겠다는 생각을 하며 스스로를 달랬다. 그렇지만 딱 한 달이 되던 날, 전화가 왔고 나는 구술자 이경희(가명)씨와 마주 앉게 되었다. 말은 통하지만 단어나 상황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관련 자료들을 열심히 뒤져가며 그녀를 만났고 인터뷰 횟수가 쌓일 무렵엔 그녀도 나에게 개인적인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부모님은 살아 계시냐, 고향은 서울이냐, 아이들이 있냐, 몇 살이냐 등등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내게 질문을 했다. 그러다 마지막 추가 인터뷰를 마무리하고 헤어지기 직전 정말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그런데 나 같은 사람 이야기도 들을 게 있긴 있어요?”
유명한 사람 힘 있는 사람 남보다 뛰어난 사람의 이야기들에 익숙한, 누구든 할 법한 질문이었다. 일어서려다 말고 다시 앉아서 우리는 한참을 더 이야기 나누었다. 

9개의 구술 작업은 당연히 일사분란 하지 않았다. 어떤 때는 책을 가져오겠다고 구술자에게 한 약속이 공수표가 될까 봐 조마조마한 순간들도 있었다. 삐뚤빼뚤 다르게 진행되었지만 조금씩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고 책으로 나오기까지는 2년이 훌쩍 넘는 시간이 걸렸다. 느리게 가던 작업 기간과는 다르게 책으로 출간하고 북펀딩을 하고 북토크를 준비하는 과정은 재단과 출판사에서 나서서 하니 거의 빛의 속도쯤으로 느껴졌다. 든든하고 고마웠다. 

전태일재단에서 마련해 준 공간에서 북토크를 하던 날, 구술자 분들을 직접 만나니 마치 소설 속 주인공을 만난 것처럼 신기하기도 하고 오래 알고 지내던 지인을 만난 것처럼 반갑기도 했다. 무대 위로 모셔서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눈 분들도 있었지만 관객석에 앉아 계시던 구술자분들의 이야기도 잠시나마 들을 수 있어서 좋았고 이어진 뒷풀이 자리에선 좀 더 친밀하게 눈을 마주하고 이야기 나눌 수 있어 북토크 때의 아쉬움을 달랠 수 있었다. 

돌아오는 길, 그 동안의 여정들이 짧게 느껴졌다. 그리고 아쉬웠다. 아직 못 다한 이야기가 있고 듣지 못한 이야기들이 있는 것 같아서. 그리고 더 듣고 기록하고 싶어졌다. 우리 곁에 수많은 ‘작은’ 사람들의 크고 작은 이야기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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