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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 소식

민들레(7호) 문화인 노회찬 - 한글 사랑꾼 노회찬

재단활동 2019. 11. 28





이건범 (사단법인 한글문화연대 대표)


내 옆자리에 앉아 있던 노회찬 의원은 자못 심각한 얼굴이었다. 토론회 자료집을 훑어보는 그의 표정이 좋지 않아 발표문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지 걱정이 들 정도였다. 국회의원회관 제1 간담회실에서 열린 토론회 주제는 ‘알기 쉬운 헌법 만들기’, 정의당 개헌특위 위원장으로 활동했던 그가 당의 개헌안을 발표하고 열흘 가량 지난 2018년 2월 7일의 일이었다. 축사에서 그는 이렇게 안타까움과 안도감을 밝혔다. 

“개헌 시안을 만드는 과정에서 딱 한 가지, 매우 중요한 한 가지, 어문학적인 고찰과 정비를 저희들이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완성되지 않은 것을 내놓는 듯한 미안함이 컸는데, 오늘 토론회에 발표될 글들을 보면서 ‘아, 그냥 이걸 받아들이면 되는구나.’하는 안도감을 느낍니다.”

‘알기 쉬운 헌법 만들기 운동’은 2017년 12월부터 논의를 시작하여 2018년 1월 13일에 국어단체뿐만 아니라 흥사단 등의 사회단체들까지 모두 54개 단체가 모여 국민운동본부를 꾸렸고, 개헌안 문안을 마련하기로 했었다. 개헌의 정치적 방향까지 다루다보면 배가 산으로 갈 위험이 있어서 오로지 헌법을 쉽고 우리말답게 바꾼다는 목표 아래 기존 1987년 헌법을 고쳐서 그 길을 보여주기로 하였다. 한 달 넘게 집중하여 연구하고 토론하여 추린 결과를 놓고 법률 전문가들과 토론을 벌이는 자리였다. 

한글문화연대에서는 이미 2008년부터 쉬운 말 운동을 본격적으로 펼쳐왔었기에 ‘알기 쉬운 헌법’이야말로 개헌 정국에서 집중해야 할 운동 과제였다. 행정, 법률 등에서 사용하는 공공언어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 권리와 의무, 기회와 행복을 좌우하므로, 국민의 알 권리와 평등권을 보장하는 차원에서 되도록 쉬운 말을 써야 한다. 그래서 “언어는 인권이다”가 우리 한글문화연대의 운동 구호인 것이다. 노동자의 별 전태일이 밤을 새워가며 근로기준법 해설서의 한자투성이 어려운 법률용어와 씨름하면서 ‘나에게 대학생 친구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하던 안타까움이 바로 내가 쉬운 말 운동에 쏟는 마음이다. 난 노회찬 의원도 그러했으리라 짐작한다. 




내가 한글 사랑꾼 노회찬을 만난 건 2004년 6월 말이었다. 한자로 나라 국(國) 자를 무궁화 꽃잎 안에 혹(惑) 자가 들어가 있는 모양으로 도안한 국회의원 보람(배지)을 달지 않겠노라는 그의 당당한 패기가 보도된 뒤였다. 우리 한글문화연대 운영위원인 개그맨 겸 치과의사 김영삼 씨가 매우 재치 있는 생각을 해내었다. 한글로 ‘국’이라고 새긴 국회의원 보람을 만들어 노회찬 의원에게 달아주고 다른 의원들에게도 전달하자고 한 것. 그는 자기 돈을 들여 한글 보람을 주문하였고, 나를 비롯한 몇몇 운영위원과 함께 노회찬 의원을 찾아가 직접 그의 옷에 이 보람을 달아주었다. 그는 아주 반갑게 우리를 맞아주었고, 우리는 우리말과 한글을 깔아뭉개는 세태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동료 의원들에게도 나눠주겠노라고 하여 우리는 그에게 나머지 보람을 모두 맡기고 왔다. 이것이 정치인 노회찬이 한글 사랑꾼으로서 대중 앞에 나선 첫 사건이리라.

그는 곧 기념일에 지나지 않던 한글날을 국경일로 승격시키고자 애썼고 그 뜻을 이루었다. 2012년에 국회의원이 되었을 때는 국한문혼용인 국회의원 선서문을 한글전용으로 바꾸자고 강력히 주장하여 정치 언어를 한 걸음 더 국민 쪽으로 끌고 갔다. 국회의 휘장과 보람에서도 마침내 한자 국(國)을 없애고 한글로 바꾸어놓았다. 그가 잠시 의원직을 떠나있던 2010년에 우리 한글문화연대에서 매년 열던 ‘한글옷 맵시자랑’에 모델로 선 적이 있다. ‘얼굴 빨개지는 아이’라는 글이 새겨진 옷을 입고 광화문 광장의 무대 위를 힘차게 걷던 그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는 헌법의 얼굴인 헌법 전문이 하나의 문장이라는 사실에 깊은 유감을 밝혔다. 젊은 시절 시국사범으로 구속되었을 때 공소장이 300쪽이 넘었는데, 그것이 일본식 관행대로 하나의 문장이었다는 것이다. 어느 민족에 비해도 손색없는 좋은 말과 고유의 글자를 가지고 있는 우리가 일본식 관행을 헌법에 남겨둔 것은 국민으로서 직무유기에 가깝다는 말을 이었다. 이 토론에서 나오는 내용을 개헌뿐만 아니라 입법 과정에서도 적극적으로 반영하겠다고 하던 노회찬 의원. 국민 대다수가 알아듣지 못하는 ‘컨센서스’라는 쪼가리 영어를 섞어 “국민과의 컨센서스가 중요합니다.”라고 유식한 체 방송에서 열을 내는 정치인이 수두룩한 오늘날, 진정으로 그가 그립다. 그는 우리말 사랑꾼이었고, 한글 사랑꾼이었다. 

(*한글문화연대에서는 매년 한글날에 우리말 사랑꾼을 뽑아 발표하는데, 2019년에는 노회찬을 우리말 사랑꾼 가운데 한 사람으로 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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