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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11호) 음식天國 노회찬 <8>신수동 영광굴비

재단활동 2020. 03. 31

- 글 이인우 <한겨레> 기자, 일러스트 김경래 기자







1.
마포구 신수동 신수초등학교 옆 보리굴비정식집 ’영광굴비’(마포구 대흥로43)는 노회찬이 즐겨찾던 점심 식당의 하나다. 외관이나 위치는 동네식당이지만 굴비 맛만큼은 서울 전체로도 손꼽을 만한 집이다. 굴비의 고장 전남 영광 출신의 주인아저씨가 직접 영광 법성포에 있는 고향집 덕장에서 말린 굴비를 가져와 판매하고 부인 황갑순(64)씨가 식당을 운영한다. 10여년 전 서강대 건너편에서 처음 문을 열었고, 그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4년 전 이곳으로 이사왔다. 손님 상당수가 국회 관계자, 방송사 언론인, 연예인 등이다 보니 여의도와 가까와진 후 장사가 더 잘된다고 한다. 노회찬도 친구 따라 왔다가 바로 단골멤버가 됐다. 주인 황씨는 노회찬 이야기를 꺼내자 금세 안타까운 표정이다. "10년 넘어 오셨다. 그렇게 떠나기 얼마전에도 들리셨는데"라면서 식당 1층 안쪽 자리를 가리킨다.

여의도에서 가깝고 단골 중에 국회사람이 많은 곳이니만큼 이야기 손님으로 노회찬의 첫 의정활동을 도운 당시의 젊은 보좌진들을 초대했다. 노회찬이 처음으로 의정활동을 시작한 것은 2004년 17대 국회에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의원이 되면서부터. 당시 민주노동당은 지역구 2석, 비례대표 8석 등 총 10석을 얻는 기적을 창조하며 진보정치의 첫 의회진출을 성공시켰다. 당시 선거운동을 지휘하다시피한 노회찬은 사실상 비례대표 말번으로 뒷문을 지켜야했기 때문에 당선까지는 기대하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노회찬은 사무실에 들어가 자고 있었다는데, 밤샘 개표 막바지에 극적으로 총득표율이 자민련을 앞서면서 김종필의 10선을 저지하고 당선되는 또하나의 드라마를 연출했었다.

노회찬의 첫 의정활동 3년 7개월은 가히 눈부신 바가 있었다. 입법활동으로는 호주제 폐지, 장애인차별금지법 제정과 같은 성평등과 소수자인권 보호 활동이 단연 눈에 띄고, 생활정치로는 자영업자 카드수수료 인하운동이 서민들의 박수를 받았다. 사회정의로는 안기부엑스파일(삼성엑스파일) 속의 떡값 검사 실명 공개 사건을 빼놓을 수 없다.

이런 숱한 일을 벌이고 만든 17대 국회 의원회관 712호의 8명 보좌진 가운데 언론홍보담당 박영선 보좌관(현재 민주당 진선미 의원 보좌관), 수행보좌관 김상욱씨(현 자루애드 경영지원실장), 인터넷홍보담당 노현석씨(데이터분석가),  노회찬과 가장 가까운 동료 의원이었던 조승수 전 의원 보좌관 이강준씨(현재 노회찬재단 사업기획실장), 노회찬의 최장수 보좌관이었던 박규님 노회찬재단 운영실장 등이 함께 식탁에 둘러 앉았다. 자기들끼리도 오랜만에 한 자리에 모인 듯 반가움에 겨운 첫 마디가 “왜 이렇게 늙었어?"이다. 여전히 현역 의원을 보좌하고 있는 박영선 보좌관은 감회가 더욱 남다른지 간직하고 있던 첫 보좌관 명함도 가져왔다. ‘우리시대 진보정치의 희망/민주노동당 국회의원 노회찬’. 국회의원, 민주노동당, 진보정치 같은 단어들이 한 문장을 이루는 게 "이거 실화야?"라고 되묻고 싶을 정도로 신기했던 시절의 증거물이다.


2.
"모두가 다 초짜였다. 의원님도 초보, 보좌진들도 지금은 대통령비서실 일자리기획조정비서관으로 가 있는 이준협 보좌관을 제외하고 모두 초보. 그래서인지 국회 생활이 더욱 설레고, 떨리고 그랬던 것 같다."






그 초보들의 의정활동 이야기를 들어본다. 진보정당의 실현을 자신의 가장 큰 목표이자 업적으로 자부하는 ‘국회의원 노회찬’이 ‘진보정치의 희망’이 되어 처음 맡은 상임위는 법사위원회. 여야의 법률가 출신 의원들이 주로 포진한 곳이라, 노동운동가 출신의 노회찬이 실력을 발휘하기가 어려울 것만 같은 곳이었다. 실제로 노회찬은 진보정당의 원내외 활동 폭을 넓히기 위해 정무위에 배속되기를 희망했으나 이뤄지지 못했다. 힘센 기존 보수정당 의원들이 인기 많은 정무위의 자리를 내주지 않은 것. 소수당의 비애였다. "얼마동안 버텨보기도 했는데, 노의원의 학교 선배인 민주당 유인태 의원이 간곡하게 설득하는 바람에  결국 법사위를 받아들였다. 노회찬은 당선자시절부터 원내활동에 대한 상을 정무위로 정하고 준비하면서 주요 정책보좌진들도 경제학박사들을 선발해놓은 상태였다. 1달여 만에 상임위가 법사위로 바뀌자 ‘알아서 그만뒀던’ 그 두 명의 박사들을 차마 붙잡지 못했던 미안한 마음을  꽤 오랫동안 갖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노회찬이 정무위가 아니라 법사위로 간 것은 결과적으로 잘된 일이었다. 호주제 폐지, 장애인차별금지법 입법 등을 통해 국민들의 기본권을 높이고 아픈 곳을 돌보는 의회활동을 선두에서 실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상임위 일상 활동도 노회찬답게 금세 적응했다.

"다른 당 의원들이 대부분 율사 출신이라곤 하지만, 노의원님도 꿀릴게 없어요. 수배를 당하고 재판을 받고 큰집에도 살아봤으니, 법조계 출신 아닌가요? 하하"

법사위 활동은 현장 위주의 어프로치였다. "처음 교도소를 6군데 돌았는데 접견 순서는 갇힌 사람(수형자)- 감시하는 사람(교도관)- 위에서 관리하는 사람(교도소장) 순이었다. 노회찬의 생활신조였다. 그때 유명한 탈옥수였던 신창원까지 만나 교도소내 인권과 처우 문제 등에 대한 솔직한 의견을 들어보기도 했다." 그렇게 노의원과 관계를 맺은 신창원은 교도소에서 노회찬에게 서신을 자주 보냈고, 한번은 영치금을 모아 정치후원금으로 보내기도 했다. 선거권이 없는 사람은 정치후원금을 낼 수 없는 정치자금법에 대한 사정얘기를 전하고 돌려 보내기도 했다고 한다. 교정시설이나 보호시설의 식사 개선을 위해 우리 교도소 식판들을 주한미군 수형자와 비교해 개선을 요구하고, 기결수의 노동단가를 몇배로 높인 사람도 노회찬이었다.  죄는 미워도 인간으로서의 기본권은 최대한 보장하는 것이 재범율을 낮추는데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 법사위원 노회찬의 생각이었다.

17대 국회 후반기에는 소상공인 신용카드수수로 인하 운동과 장애인차별금지법 제정 투쟁이 노회찬의 무대였다. "신용카드 수수료는 대형마트의 경우 2.5%인데 반해 소규모 자영업의 카드수수료는 최고 4.7~8%에 달했다. 로비력의 차이였다. 이걸 개선해보자고 당에서 투쟁본부를 만들고 노의원이 본부장을 했다. 이 일을 계기로 민주노동당을 노동자당으로만 알던 영세사업자, 소상공인들의 민주노동당에 대한 인식이 많이 달라졌다. 집회 참여 호응도 높았다. 민노당 집회 중 어쩌면 가장 성향이 다른 집회를 이들이 해냈다. 그때 우리도 아, 이런 게 생활정치구나, 싶었다. 서민을 위한 정치를 해냈다는데 보람과 자부심이 컸다."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공동대표 주도로 국회 안에서 장애인들이 국회를 "회칠한 무덤"이라고 성토하면서 한바탕 시위를 벌인 일도 잊을 수 없는 일이다. "그때 그분들을 우리가 초청해 국회에 들어올 수 있었는데, 시위가 벌어지니까 국회경위들이 출동하고 관할경찰서도 난리가 났다. ‘재발 방지’ 차원에서 의원실관계자도 엄단하겠다며 공포를 쏘기도 했다." 민주노동당 10명의 의원들과 보좌진들은 17대 국회에서 모두 일당백을 했다. 노동자 서민들을 위한 온갖 법률을 만들어내고 불합리한 법들을 뜯어 고치고 의제화하고...  모든 일을 일사천리로 해낼 수 있었던 것은 시민사회단체-당정책실-의원실 라인이 원팀으로  형성되어 있던 탓이었다. 민주노동당 국회의원 10명은 항상 국정감사 베스트 의원에 선정되었다.

국회의 권위와 의원의 특권을 내려 놓았던 일을 짚고 가지 않을 수 없다.  국회의원 세비를 당에 반납하고 노동자 평균임금에 해당하는 금액만 받았고, 철도 무임승차권 카드도 모두 자진 반납했다.  당시에는 의원들만 타는 의원전용 엘리베이터가 따로 있었는 데 그 이상한 나라의 특권을 민주노동당은 가만히 둘리 없었다. 국회에는 인턴, 9급비서, 7급비서, 6급비서, 5급 비서관, 4급보좌관의 직급체계가 있는 데 노회찬의 제안으로 민주동당은 모두 보좌관 호칭을 쓰게 했다. 

노회찬은 보좌진의 생일등 기념일도 꼬박꼬박 챙기는 자상한 의원이었다. 환경미화원 어머니들에게도 자신이 받은 선물을 건네기도 했다.


3.
노회찬의 초선의원 시절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 ‘떡값검사’ 실명 공개 사건이다. 2005년 안기부엑스파일(삼성엑스파일) 사건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1997년 삼성그룹 이학수 부회장과 홍석현 중앙일보 사장(사건 당시 주미대사였다)이 검사들에게 촌지를 준 사실을 이야기하는 대화를 안기부가 도청을 했는데, 그 녹음파일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져 큰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노회찬은 이 파일을 당시 MBC 이상호기자로부터 입수해 수백번 음성파일을 들으며 내용확인 작업을 거쳐 재벌로부터 돈을 받은 전·현직 검사 7명의 실명을 세상에 공개했다. 

당시는 언론사나 정치인들도 검찰을 의식해 떡값검사가 누구인지를 구체적으로 적시하지 못하고 있을 때였으니, 노회찬이 파일을 입수하고자 한 것은  떡값검사 이름을 직접 확인할 수 있으면 바로 공개하겠다는 결심이나 마찬가지였다.

노회찬의 떡값검사 공개는 국민들의 열렬한 지지와 환호를 받았다. 격려전화가 쇄도했고 후원회원도 폭발적으로 늘었다. 그해 수많은 잡지의 표지를 장식했고, 많은 언론이 그를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다. 

그러나 검찰은 공소시효 만료, 독수독과이론(불법취득 자료의 증거능력 불인정) 등을 내세워 촌지를 준 재벌쪽과 받은 쪽인 검사들 모두 불기소 처분하는 것으로 수사를 종결했다. "당시 이 사건 수사책임자는 황교안 서울지검 2차장검사였는데 잘 알다시피 노의원과 고교 동창이었다. 다들 의원실에 모여 황검사가 수사결과를 발표하는 텔레비전 중계를 지켜봤다. TV화면에서 친구인 황교안이 수사결과를 발표하는 동안, 노의원은 화면을 등에 지고 창문밖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계셨다. 마침 의원실 창틀의 십자 프레임이 겹쳐지면서 의원님이 십자가를 지고 있는 듯한 실루엣이 만들어진 게 하도 강렬해서 노현석 보좌관이 아이폰으로 사진을 찍어두었을 정도였다."

노회찬은 2년 뒤 명예훼손 및 통신비밀보호법 위반으로 기소가 돼  2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으나 2013년 대법원이 유죄로 뒤집으면서 19대 의원직을 잃는 고초를 겪게 되었으니, 그때 그 장면은 노회찬의 뇌리에도 더욱 장렬하게 새겨졌을 것이다.

폭탄주 몇잔이 돈 김에 어리석인 질문을 던져본다. "그는 왜 고난이 예상되는 위험하고 어려운 역할을 자처했을까요?" 즉답이 나왔다. "정의로운 사람이니까."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그는 엑스파일 존재를 확인했을 때 이미 하나의 계산밖에는 없었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대한민국에서 재벌눈치 안보고, 검찰 두려워하지 않고 떡값검사를 만천하에 폭로할 사람이 ‘국회의원 노회찬’ 말고 누가 있을까. 운명이라면 운명, 책무라면 책무가 역사책처럼 그 앞에 놓였던 것이다.






4.
황갑순씨의 남편께서는 어려서부터 보고 자란 일이라 굴비에 대한 지식이 풍부했다고 한다. 직장을 나와 이런저런 장사를 해보다가 본인이 잘 아는 굴비유통사업을 시작했다. 고향에 덕장을 짓고 집 옥상과 마당에서도 굴비를 말린다. 가을 파시에 조기를 경매해 소금에 절여놓았다가 겨울 세달동안 법성포 해변에서 말린다. "우리 아저씨가 소금간을 아주 잘한다. 소금 간 잘 하고 법성포 해풍에 잘 말리는 게 우리 집 굴비 맛의 비결이다."  황씨는 바다가 없는 전남 장성이 고향. 바닷가음식은 영광사람한테 시집와서 배웠단다. 음식장사도 이 보리굴비집이 처음이라는데 바로 맛집이 된 걸 보면 본래 음식솜씨가 좋은 분이었으리라. 식탁에 올리는 열가지 반찬도 모두 집에서 식구들에게 먹이던 그대로라고 한다. 이 집의 주메뉴는 굴비 정식. 조기매운탕과 간장게장도 있다. 병어가 클대로 큰  5월에는 ‘덕자찜’이 주당들의 군침을 돋운다.






전통적인 보리굴비는 항아리에 겉보리를 켜켜이 깔고 그 사이에 조기를 넣어 말린 것을 말한다. 그러나 요즘은 대부분 식당이 냉장고를 사용한다. 냉장시설이 발달된 때문이기도 하지만 식당 물량의 보리굴비를 대려면 항아리 방식만으로는 어림없을 것이다. 박영선 보좌관은 마침 시댁이 영광이고 세 자녀 등 온 가족이 다 굴비를 좋아해 냉장고에 늘 굴비 한두릅 이상이 들어있을 정도의 굴비 전문가. "보통 굴비는 말리고 찌는 기술이 중요하다. 잘못 말리면 내장에서 냄새가 나는데 이 집은 전혀 냄새가 없다. 껍질도 보통은 질겨서 벗겨내고 먹지 않는데, 이 집은 껍질까지 먹을 수 있는걸 보니 아주 잘 말렸다. 가격도 이정도면 가성비 만점이다. 퍼펙트.“


5.
어느덧 일어설 시간이다. 보리굴비맛만큼이나 이야기도 맛있고 풍성했다. 나눈 이야기의 반도 다 기록에 남기지 못한다. 언젠가 추가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이들 노회찬키드들은 17대 국회에서만큼은 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실이 가장  일 많이 하고, 일 잘 하기로 소문난 의원실이었다는 자부심을 공유하고 있었다. "너무 일을 많이 벌이는 바람에 주변 의원실 보좌관들의 눈총을 많이 받았다. ‘좀 살살해라, 우리가 힘들다’."

떡값검사 공개로 한층더 믿음이 높아진 노회찬 의원실로 각종 제보가 쏟아졌다. 상임위 구분이 따로 없었다. 경복궁 경회루에서 일부 특권층이 밤에 몰래 파티를 한다는 문화재청 관련 제보가 문광위가 아니라 노회찬의원실로 왔을 정도다. 제보가 다양하다보니 그것을 다루는 보좌진들도 육해공군을 겸해야 했다. "그때 하도 다양한 분야를 해봐서인지 다들 일당백이 됐지요."

2005년부터 세계여성의 날(3월8일)에는 여성노동자, 청소노동자 등 각계각층의 여성에게 장미꽃을 선물하자는 노회찬의 아이디어는 14년동안 지속되었고 그가 없는 지금도 노회찬재단에 의해 16년째 계속되고 있다. 2004년 5월 30일 첫등원한 노회찬은 국회뱃지가 한글화 될 때까지 의원뱃지 착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한글문화연대에서 한글뱃지를 만들어 노회찬에게 전달했고  노의원은 모든 국회의원들에게 한글뱃지를 배부하며 한글국회운동을 전개했다. 이 한자뱃지는 노의원에 의해 2014년 5월 2일 드디어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노의원의 한글사랑운동도 노회찬재단에서 사업으로 이어가고 있다.






끝으로, 칭찬만 늘어놓고 끝나면 이야기의 신뢰도가 떨어질 수도 있으니 흉을 조금 보는 것으로 마무리하자고 했더니 김상욱 보좌관이 입을 먼저 뗀다.  "의원님이 보좌진 전체 휴가로 남도기행을 보내줬는데 거기서 지금의 아내와 눈이 맞아 결혼했다"가 흉이라고 나온다. 흉볼게 그렇게 없나요?

"한번은 국회출입기자들이 우리 방을 보좌관이 가장 일 많이 하는 의원실 1위로 뽑았는데 의원님이 너무 좋아하는거예요. 이거 얄미운 당신 아닌가요?" 박영선 보좌관이 뒤를 이어본 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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