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회찬재단 - 평등하고 공정한 나라


재단 소식

민들레(11호) 문화인 노회찬 - 노회찬은 계속된다 (한학수, MBC PD)

재단활동 2020. 03. 31





노회찬 의원을 처음 만난 것은 2005년이다. 물론 그전에도 짧은 인터뷰를 한 적은 있지만, <한국의 진보> 3부작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 인간 노회찬을 깊이 들여다보게 되었다. 80년 광주 민주화운동이 시작된 지 25년을 맞아, 한국의 진보세력이 가졌던 꿈과 좌절 그리고 희망에 대해서 돌아보는 다큐멘터리였다. 전기 용접공 자격증을 따고 위장취업한 학출 노회찬, 인민노련이라는 지하조직에서 활동하던 혁명가 노회찬, 민주노동당이라는 이름으로 원내에 진출한 국회의원 노회찬의 이야기가 수많은 진보 활동가들과 함께 소개되었다.




당시 노회찬 의원은 촬영을 위해 20년만에 용접봉을 잡아주었다. 오랜만에 용접을 해서 잘 할지 모른다고 했으나, 금방 제 실력이 나왔다. 나는 그 때 용접하는 노회찬의 표정에서 여러 가지를 보았다. 청춘의 20대가 꿈꾸었던 혁명 그리고 수배와 투옥, 지하에서 합법정당으로 변신하는 수많은 우여곡절 속에서 이제는 어느덧 오십이 되어버린 한 남자가 거기 있었다. 어찌 이게 노회찬 혼자의 모습이라고 하겠는가? 나는 그의 어깨에서 ‘진보의 아이콘’ 노회찬이 갖는 부담과 고뇌를 조금이나마 느껴볼 수 있었다. 


유명인들을 취재해보면 여러 가지를 느끼게 된다. 어떤 이는 탁월하고 전문적인 식견이 있고 또 어떤 이는 정말 가공할 정도의 인내와 노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하지만 한 꺼풀 더 깊이 취재해보면 그의 인간적인 모습들이 드러난다.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동료들이 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하나씩 드러나게 된다. 실망스러울 때도 있지만 뭐 때로는 인간적인 흠결로 느껴질 때도 있다. 노의원은 이런 점에서 정말 질투가 날 정도였다. 일 잘하는 노회찬 보다는 오히려 따뜻하고 배려심 있는 노회찬을 수도 없는 주변인들이 증언했다. 목표를 추구해가면서 어려울 때마다 주변을 돌아보고 챙기는 마음이 있어 보였다. 이러기 참 힘든 데, 인간 노회찬은 참 ‘남을 먼저 챙겨주는 깊은 사람’이었다.

실사구시(實事求是), 이 말은 노의원을 취재하면서 여러 차례 들었고 또 공감했던 말이다. 격동과 이념의 시대를 거치면서 또 수많은 선진 사상이 들어왔지만 그것을 소화해서 우리 것으로 만드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론과 도그마에 갇히는 게 아니라, 항상  실사구시라는 생각으로 문제를 다시 보려 한다고 노의원은 말했다. 어쩌면 나에게 하는 말 같기도 했다. ‘한피디! 자네도 도그마에 갇히지 말고, 실사구시라는 관점과 유연함을 잃지 말게’




다큐멘터리를 마치고 뒷풀이를 하면서 노의원과 맥주 한잔을 한 기억이 난다. 소탈한 그의 웃음이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나는 노의원이 세상을 떠났을 때, 믿을 수가 없었다. 나중에 그의 묘소를 찾아갔을 때, 슬프고 또 슬펐다. 2018년 7월 24일 자정 넘어 2시, 노의원 휴대폰 번호에 부질없이 다음과 같은 문자를 남겼다.

“아, 분하고 원통하다. 부디 좋은 세상에서 이재영 오재영과 술 한잔 하면서 세상 시름 잊기를! 함께 했던 날들을 잊지 않을께요. PD수첩 한학수 올림”

노회찬 의원의 휴대폰 번호로 한 달 뒤에 부인 김지선씨가 감사의 문자를 보내왔고, 세 달 뒤에는 <노회찬재단준비위>가 꾸려진다는 문자가 이어졌다. 노회찬은 갔으나 우리는 그를 보내지 않았다. 노회찬은 계속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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