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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 소식

민들레(19호) 후원회원 이야기 - 노동자 곁에 늘 있었던 노회찬

재단활동 2020. 12. 01




후원회원 이야기

노동자 곁에 늘 있었던 노회찬



나는 2001년 한국까르푸 노동조합 중계지부에 가입하였다. 정치문제에 관해서 관심이 없었지만,그 뒤 바로 나는 중계에서 가까운 민주노동당 노원갑 지역위원회로 달려가 당원 가입을 하였다. 노동조합 중앙이 원거리에 있어, 지역의 도움을 받으려는 생각이었다. 당시 민주노동당은 민주노총이 만든 정당으로 신뢰도 있었다. 민주노동당은 2004년 17대 총선에서 10명의 비례 국회의원들이 배출되면서 원내정당이 되었다. 나는 그때 노회찬을 처음 알게 되었고, 진보정치가 왜 필요한지 하나씩 알아 나갔다.

2006년 6월 한국까르푸는 이랜드로 매각되었고, 그해 11월30일 국회에서 직권상정으로 비정규직법이 통과되었다. 비정규직법으로 대량해고가 벌어질 것이라는 우려 속에서, 2007년 이랜드는 7월1일 비정규직법 시행을 앞두고 비정규직 대량해고를 자행하였다. 이랜드 홈에버 510일 투쟁의 서막이 올랐다. 6월30일부터 이랜드 홈에버 여성노동자 600여 명이 홈에버 월드컵 매장을 점거하였다. 이때 10명의 민주노동당 국회의원들이 번갈아 가며 방문하여 비정규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지하는 발언을 하였고, 투쟁을 엄호하였다.  20일간의 점거는 경찰의 강제 진압으로 마무리되었다. 우리 여성노동자들이 연행되어 끌려가는 마지막 과정까지 일부 의원들과 노회찬 의원은 우리와 함께했다.

2008년 18대 총선에서 노회찬은 노원병 지역구로 출마를 선언했다. 노원병은 상계동에 인구가 많아 새롭게 만들어진 선거구였는데,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많고 진보적인 생각을 가진 주민들도 많은 편이었다. 또 젊은 신혼부부들이 많은 곳이었다. 나는 노회찬 후보가 우리동네의 국회의원으로 당선되기를 바랐다. 우리 노동조합도 510일 파업 전술로 이남신 수석부위원장이 진보신당 비례 1번으로 선거에 출마했지만, 나는 노회찬 후보의 선거 일정에 맞춰 조합원들과 함께 선거운동을 지원했다. 

노회찬을 지지하는 많은 이들이 상계동을 찾았고 선거 분위기는 무르익었다. 노동자들과 서민들은 노회찬의 유세에 귀 기울이며 지지를 보냈다. 노원의 젊은 청년들도 노회찬에 대한 기대가 컸는지, 상계동에서 초중고를 나온 나의 아들은 친구들의 인맥을 이용한 피라미드식 전화 선거운동으로 자원봉사를 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노회찬 후보 선거사무실에 아들을 데려다 주었다. 아쉽게도 노회찬은 한나라당 전략공천으로 나온 홍정욱에게 패했다.

그런데도 노회찬은 노원에서 진보의 그림 단추로 40%의 지지를 받았다. 노회찬이라 가능했다. 이명박, 박근혜 시절 힘들었던 노동자, 서민들을 위한 폐부를 찌르는 촌철살인의 발언으로 사이다 같이 속을 터 주었던 노회찬 , 대중적이고 쉬운 언어를 사용하며 다가왔던 노회찬… 나는 그와 같은 하늘, 같은 동네 노원에서 살았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 

노회찬은 아직도 우리 곁에 살아있다. 우리들의 마음속에 살아있다. 우리 노동자들이 만들려는 세상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면서, 그 곁에 노회찬을 다시 살려내자.


- 이경옥 (홈플러스일반노동조합 지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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