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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 소식

민들레(28호) 문화인 노회찬 - 청년 노회찬

재단활동 2021. 08. 31




문화인 노회찬

청년 노회찬



3년 전, 방송을 통해 그의 부음을 접하고 나는 정신줄을 놓고 비탄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항상 ‘나’보다는 ‘우리’를 생각하고 더 아름다운 ‘우리’를 위해 희생하며 다가올 모진 풍파를 알면서도 온몸으로 꿋꿋하게 헤쳐 나가던 이. 그 며칠 후 장례를 마치고 그의 고등학교 동기 친구들이 찾아와 우리는 밤 늦도록 통음을 하며 그와의 이별을 아파했다.


내가 노회찬을 처음 만난 것은 2000년대 초로 기억한다. 90년대 중반 교통사고로 몸을 크게 다쳐 하던 일을 접고 신촌에서 운영하던 Studio 70’s라는 음악 공간을 어느 날 그가 방문하면서다. 자연히 70년대 음악을 같이 들으며 70년대 이야기를 주고 받던 중 불쑥 그가 “곽형, 우리 친구합시다” 하며 손을 내밀고 나 역시 반갑게 그를 친구로 맞게 되었다.

그 후로 가끔씩 그는 몇몇 일행과 함께 Studio70’s를 찾아 주었고 우린 이 풍진(?) 세상을 잠시 음악과 정담과 웃음 풀이로 달래곤 했다.


한 번은 구소련을 방문했을 때의 이야기 중에 나는 그곳 모스크바의 국립박물관의 규모와 전시물의 다양성에 대해 얘기하는데,

“곽형, 내가 모스크바에 도착하고 제일 먼저 달려간 곳이 어딘 줄 알아? 빅토르 최의 무덤이었지. 절부터 올렸어,”
순간 나는 멍하니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반추했다.
“—이 친구의 세계가 국립박물관급이라면 나의 것은 무덤급이구나—“

하루는 스튜디오로 들어오자마자 다가와,

“곽형 오늘은 우리와 함께 술 많이 마셔야 해”하며 일행 중 한 명을 민노당 대구위원장이라 했다. 그제서야 나는 왜 그가 그 말을 했는지 바로 이해가 갔다. 어려운 곳에서 고생하고 있는 후배를 배려한 추임새였다.

꽉 찬 칠십 년대 rock의 울림과 그의 유머로 술자리가 질펀하게 익어갈 무렵, 그는 불현듯 일어나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음악에 맞춰 한 사람 한 사람의 어깨를 감싸더니 온몸을 불사르듯 춤사위가 화려해지더니 다시 벽으로 가 벽을 부여안으며 무아의 지경으로 가는데, 그의 표정에는 환희와 또 아픔이, 희망과 안타까움이 때로는 어루만짐과 분노가 웅크림과 용솟음으로ㅡㅡ세상의 모든 감정이 함께 섞여, 어떤 형용으로도 표현하기 힘든ㅡㅡ음악과 어우러져 나머지 일행은 넋을 놓고 있었고,

그날 나의 친구 노회찬은 Led Zeppelin이 깔아준 *계단을 밟고 ‘Deep purple’에서 deepest purple로 긴 여행 중이셨다.
ㅡ음악을 가슴에 품지 않으면 불가능한 여행.

그가 떠나기 얼마 전 가게에 자주 오던 시 쓰는 김정환형이 흥이 오르자 “야, 노회찬 부르자, 노회찬. 전화해봐라”하는 예의 번개 초대를 강요받아 통화한 것이 그와의 마지막 통화였고, 지금도 가끔 함께 듣던 음악을 들으며 입구 쪽으로 눈을 돌린다. 약간의 장난기 어린 미소로 다가오는 우리의 청년 노회찬을 떠올리며…

보탬 글 ; 가끔은 이 노래를 들으며 이 곡에는 우리의 청년 노회찬의 어떤 춤사위가 숨어 있을까 생각하곤 한다.

“하늘 아래 큰 것 없네 땅 위에 새 것 없네. 이리로 가는 우리 배냐 저리 가는 우리 배냐”
- 김민기의 밤뱃놀이 중에서


*계단 ; Led Zepplelin의 Stairway to heaven에 은유함.


- 곽상완 (Studio70’s D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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