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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49호)] 특별기고 - 기록을 시작하며 (이광호, 노회찬평전 저자)

재단활동 2023. 06. 16





특별기고

기록을 시작하며

- 이광호 (노회찬평전 저자)



2018년 12월 27일, 그해 여름 무더위 속에 그가 떠난 후 설립된, 고인의 이름을 딴 재단이 마련한 송년 모임이 있던 날이었다. 재단 사무실이 있는 마포 인근 한 식당에 제법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매섭게 추운 날이었지만 모임 도중 나를 비롯해 몇몇은 담배를 피우기 위해 밖을 들락거렸다. 그러다 그날 ‘흡연 동지’ 중 한 명이었던 조현연과 단둘만 있게 되었는데, 그가 넌지시 물었다. ‘노회찬 평전’을 써보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내가 그 제안을 수락한 것은 2019년 5월이었다. 

몇 차례의 평전기획위원회 회의에서는 ‘작가의 관점’이 투영된 평전을 강조하는 주문도 적지 않았다. 객관성을 버리라는 것은 당연히 아니었고, 작가의 시각과 해석이 필요한 대목에서는 그것을 분명히 하는 게 좋겠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나는 작가의 관점보다 노회찬의 노선과 입장을 가능한 한 객관적으로 다루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봤다. 이 두 가지 관점이 꼭 상충되는 것은 아니었고, 세상사 많은 일이 그렇듯 이것도 양단간의 선택 문제라기보다 결국은 정도의 문제였다. 객관적 사실을 기록했다는 연보나 일지도 ‘사실의 선택’일 수밖에 없으며, 작가의 주관적 평가를 강조했다는 평전도 객관적 사실에 근거하지 않으면 위험한 억견에 지나지 않는다.

노회찬은 나보다 한 살이 많지만, 고입 재수를 1년 했기 때문에 그의 고교 동기들은 대부분 나와 동년배다. 평생을 혁명가, 정치가로 살겠다고 마음먹기 시작한 그의 고교 시절은, 시간대는 나와 일치하지만, 공간적으로는 십만 팔천 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가 유신정권에 맞서 저항한 운동권 고등학생이었을 때, 나는 이태원 클럽에서 밴드를 하던 불량 학생이었다. 그가 데모하기 위해 대학에 들어갔을 때, 나는 대학에 갈 마땅한 이유를 찾지 못해서 중도에 고등학교를 그만두었다. 그가 인천에서 지하 혁명가로 고투하고 있을 때, 나는 지상에서 노동운동과는 멀리 떨어진 채 책을 만들고, 기사를 쓰는 일을 하고 있었다.

1990년대 초 노회찬을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 정책실장이었다. 그리고 2000년 민주노동당이 창당되었을 때 노회찬과 같은 공간에서 일하게 되었다. 내가 민주노동당 기관지 『진보정치』 논조의 방향을 잡는 데 어려움을 겪을 때 노회찬의 시각에 많은 빚을 졌다. 그러나 2008년 분당 때는 서로 다른 입장이었고, 그 이후 진보정당의 이합집산 과정에서는 한때 다른 당의 당원이기도 했다. 

내가 노회찬에 대한 책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나에게 “노회찬은 한마디로 말하면 어떤 사람이야?”라고 물었다. 한 인간을 한마디로 표현하는 게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그 한마디로 그를 온전히 설명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사람들의 질문에 처음에는 ‘불가능’ 운운하면서, 심지어는 한마디로 한 사람을 표현하라고 하는 것은 폭력일 수도 있다면서 답을 얼버무렸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보면 그 질문은 관심과 애정에서 나온 것이고, 저자는 그 질문에 답을 해야 할 의무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라면 어떻게 대답했을까”라는 질문으로 이어졌다.

“노회찬은 대한민국에 명실상부한 대중적 진보정당을 ‘만들고’ 진보정치 시대를 대중적으로 ‘열어간’ 대표 정치인이었고, 진보정당의 집권으로 세상을 바꾸기 위해 자신의 온 삶을, 영혼까지 바친 ‘우직한 정치인’이었다.”

이것이 내가 찾은 대답이다. 2000년 민주노동당이 창당되자 그는 “인생 목표의 절반이 해결됐다”라고 말했다. 나머지 절반의 목표였던 진보정당 집권은 자신의 사후 50년이 되어야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라고 말하기도 했는데, 2004년 민주노동당이 국회의원 10명을 배출한 이후에는 생전에 가능한 목표일 수 있고 가능하게 해야 한다고 했다.  

‘노회찬’이 어떤 사람인지 내가 한두 마디로 정리한 답변은 나무에 비유하자면 뿌리와 곧게 뻗은 줄기만 설명한 것이다. 노회찬은 크고 작은 가지와 이파리, 꽃과 열매로 울창한 숲을 연상시키는 나무였다. 그 나무에서 뻗어 나온 것들을 묘사하기 위해서는 여러 언어가 필요하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사랑을 실천한 현명한 무신론자, 마음이 따뜻한 유물론자, 마키아벨리스트와는 거리가 먼, 순진한 구석이 있었던 정치인, 과묵한 달변가, 변화에 열려 있고 첨단을 즐길 줄 아는 원칙주의자, 베토벤, 차이콥스키,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을 좋아한 음악 애호가, 박학다식을 뽐낸 음식 마니아, 요리를 즐긴 남자, 소년의 호기심을 지닌 어른, 페미니스트라는 이유로 비판받지 않았던 페미니스트, 이반에게 감사의 상패를 받은 일반, 술과 예술을 즐긴 불온한 낭만주의자… ‘노회찬’을 말하는 이 언어들이 어느 정도로 특별함이나 칭송을 담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노회찬의 총체적 삶이 농밀하고 풍요로웠음을 확인시켜준다고 생각한다. 월등하게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정치인 노회찬이 삶에 투여되었지만, 인간 노회찬은 삶을 뜨겁게 사랑하고 즐긴 ‘슬기로운 이중생활’의 주인공이었다. 


* 이 글은 『노회찬 평전』 도입부 ‘기록을 시작하며’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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