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회찬재단 - 평등하고 공정한 나라


재단 소식

민들레(11호) 자유인 문화인 평화인을 그리며 (최경호, 평생회원)

재단활동 2020. 03. 31




 

우편함에 소식이 오는 일이 거의 없는 나날에, 반가운 ‘생일’ 선물이 찾아왔습니다. 노회찬 재단에서 보내준 ‘후원 1년 생일’ 선물.

그가 떠난지도 어느덧 1년 반이 지났습니다. 유럽에 오셨을 때 신나서 안내를 하고 특강 의 통역도 했었던 것은, 제가 유학을 떠날 때 추천서를 써주신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지요. 잠시 한국에 다니러 오면 술도 한 잔 사주시댔는데, 막상 귀국하여 일하기 시작한 이후에는 ‘곧 만나게 되겠지’하며 통화와 문자만 주고 받다가 결국 못 뵈었던 것이 회한으로 남을 뿐입니다. 법사위에서 나온 그에게 속도 모르고 “이제 국토위에 배정 받으셨으니 같이 할 일이 많겠습니다” 라는 이야기 나눈게 마지막이었네요.

사람들이 그와 함께 찍은 사진을 올리는 걸 보다 보니, 그래서 제가 못봤던 그의 생전의.. 모습을 보게 되다보니, 이렇게 각자의 인연을 공유하는 것이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그의 모습을 더 많이 알리는 것이라는 깨달음이 있어, 2008년 파리에서 공유자전거를 체험해 보고 싶었던 그와 함께 사진을 나눕니다.

이맘때였던가요. 꽤 옛날 술자리에서 서로가 고교 동문이라는 것이 화제에 오른 적이 있습니다. 물론 저는 미리 알고 있었지요. 학연, 지연이나 엘리트주의 같은 것을 배격하는 진보판에서 이런 주제는 조금 부담스럽습니다. 같이 학창시절을 보낸 우정을 추억하는 것도 아니고 16회나 차이가 나는데.

그렇다고 (그 누구도) 모교를 부끄러워 할 일도 아니고, 억지 양심에 거슬리지 않을 수준에서의 저의 애교심의 배경을, 저는 다음과 같이 솔직하게 말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고등학교는 잘난 것도 있고 못난 것도 있지만, 교훈 하나는 끝내주게 마음에 든다“

그는 격하게 공감해주었더랬습니다.


자유인, 문화인, 평화인.

정의당이 장례식에서 '자유인, 문화인, 평화인'이 어느 고등학교의 교훈인지를 알고 썼는지 모르고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언제부턴가 그가 SNS프로필에 자신을 소개할 때 썼던 표현입니다. 제가 술자리에서 교훈 자랑을 한 다음부터였던 것도 같지만 이는 제 기억의 편집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유인, 
그는 감옥 안에서도 자꾸 사람들이 찾아오자 '모처럼 쉬면서 책을 읽어야겠다'고 방문을 잠가버렸던 이였습니다. 구속된 상황에서도 더 강한 구속을 통해 더 큰 자유를 누릴 줄 알았던 그는, 기존의 이념을 현 시대에 어떻게 적용할지를 항상 자유로운 정신으로 고민하던 이였습니다. 해외 방문중 다른 국회의원들이 대사관 차 타고 골프치러 갈때, 영문 모르는 참사관을 하이게이트 마르크스 묘지로 데려가던 자유를 누리던 분이었습니다.

문화인, 
그는 "누구나 악기 하나쯤은 연주할 수 있는 세상이 사회주의라면, 나는 사회주의자 하겠소"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하던 이였습니다. '빵' 뿐만 아니라 '장미'도 모두 품었던 그는, 격한 대립의 정치권 내에서도 그래도 유머와 품격있는 언어로 대립의 지점들을 짚고 공격을 하던 이였습니다. 첼로를 켰고, 국회의원 뱃지를 처음으로 한자에서 한글로 바꾼 이였습니다. 

평화인, 
그는 단순히 싸움이 없는 상태의 평화가 아니라, 억눌린자, 약자가 허리를 필 수 있는 그러한 평화를 위해 헌신해왔습니다. 국가기념행사에서의 팔뚝질이 논란이 되자 "사람이 주먹을 쥐고 하는 행위 중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보다 더 바람직한 일은 없습니다. 오늘 같은 날 광주 망월동 묘역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를 때 특히 그렇습니다."라 했던 그의 트윗은 갈등의 현장에서 어떻게 평화롭게 자신의 의견을 전달하는 것이 가능한지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진정한 ‘자유인, 문화인, 평화인’이었습니다. 이 문구를 어느 누구보다도 세상에 널리 알리신 이를, 오늘은 저 역시 실현하며 살자고 다짐하는 한 명의 교훈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추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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